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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침밥을 챙겨 먹여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청소기를 들고 작은방으로 건너와보니 비가 와서 '살폿해진' 아침이라 그런지 남편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눈에 와 박힙니다.

언제든 할 수 있는 청소는 잠시 접어두고 커피를 타서 작은 창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꽃망울을 터트린 딸기나무에 물을 주고 책상위에 올려놓은 안경을 집어서 살그머니 귀 위에 올려 창밖을 내다봅니다.

"역시 잘 보이네."

이 안경은 작년 근로자의 날. 남편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날 남편은 평소처럼 일터로 나갔습니다. 저 역시 남들 다 쉬는 일요일도 일을 하는 일복 터진 남편을 만난 복으로 눈물나도록 좋은 그날도 역시 집에 앉아 책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애들과 티격태격하며 나이 값도 못한 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려야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다섯 시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세요!!"
"빨리 애들 챙겨서 밑으로 내려와!! 지금 빨리…."

남편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밑으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아직 퇴근시간도 멀었고, 더구나 작은애는 한창 낮잠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잠시 고민이 됐지만 그래도 휴일이라고 두어 시간 일찍 들어와 가족들 드라이브라도 시켜줄려나 잔뜩 기대를 하고 자는 아이를 들춰 엎고, 큰애 역시 급한 마음에 계단을 두 계단씩 건너뛰며 내려갔는데….

드라이브 갈 사람이 차는 이미 주차를 시켜놓은 채 빈 뭄뚱이만을 당당하게 계단 밑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차는? 드라이브 시켜준다며?"
"내가 언제 드라이브 한대? 암말 말고 따라와 봐!!!" 하더니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버리는 겁니다.

어디가냐고, 몇 번을 물어도 그저 묵묵히 걷기만 하던 사람이 안경점 앞에 가서야 그 걸음을 멈추는 겁니다.

"여긴 왜?"
"너 안경 맞추게, 그게 뭐냐? 세상을 보고 살아야지 어떻게 보고싶은 것도 제대로 못보고 사냐? 그동안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내 아들이랑 딸을 안 잊어먹어서 고맙고, 또 집 안 잊어먹고 찾아와줘서 고마워서 내가 주는 선물이다."

저는 싫다고, 보이는 것만 보고 살아도 이제껏 아무 탈 없이 살았는데 새삼스레 무슨 안경이냐고, 차라리 그 돈으로 고기를 사 먹자고, 아니면 쌀 떨어져 가는데 쌀이나 한 가마니 들여 달라고 했는데도 평소 입에서 군내가 나도록 말수라곤 적은 사람이 마누라의 지질이 궁상에 그나마 할말을 잃어버렸던지 가타부타 대꾸도 없이 안경점 안으로 쑤욱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별수 없이 남편을 따라 안경점 안으로 들어가서도 돈이 걱정인 저는 불청객마냥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남편의 그 속내가 궁금해서 한참을 남편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참다 못 한 저는

"갑자기 왜 그러는데? 난 안경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돈도 없는데 무슨 안경이야. 자기 돈 있어? 돈 있으면 그냥 돈으로 줘요."

남편의 얼굴이 종잇짝처럼 구겨지면 눈이 세로가 되었습니다. 조용한 사람이 한번 화나면 진짜 무서운 법이기에 저 바로 꼬리 내리고 다시 고분고분하게 물었죠.

"진짜 나한테 안경 사주고 싶어요?"
"그래… 꼭 맞춰줄 거다."

"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번은 좀 해 봐라."

그러더니
"이 아줌마 시력 좀 재주시고, 안경도 한 개 맞춰주세요" 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시력을 쟀더니 안경점 아저씨는 혀를 내두르며 "그 동안 답답해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할 만큼 제 시력은 0.2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저씨의 그 말에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거봐! 넌 길치가 아니라 눈이 안 보였던 거야, 그러니까 고속도로 휴게소 한번 들어가면 차도 못 찾고, 나도 못 찾고, 화장실도 못 찾는 거지…. 그렇잖아도 새우 눈처럼 쬐그만한 눈이 안 보이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냐?"

해서 안경사가 써보라는 얄궂은 얀경같은 걸 쓰고 보니 어찌 그리도 잘 보이던지요. 참 희한하대요. 더러워진 창문에 워셔액을 뿌려 깨끗하게 닦아낸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문제는 가격이었습니다. 3만원이라고 붙었길래. '아!! 이 정도면 살 만하네" 싶어 고를 것도 없이 그저 싸다는 것에 반해 "이걸로 할게요" 했는데 "안경테에 렌즈 그리고 전자파 차단 코팅까지 하니 합이 7만5천원입니다." 이러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그러면 안 산다고, 그 돈이면 쌀이 두 포대인데 쌀 두 포대를 눈에 어떻게 얹고 다니냐며 미련 둘 것도 없이 문을 열고 나와 버렸는데 남편은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투명유리 너머로 보니까 자동차 보조키를 넣기 위해 종이를 잘라 테이프를 붙여 손수 만들어준 작은 종이집에서 꼬깃꼬깃해진 만 원짜리를 꺼내서는 건네주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얼마 동안 모아온 건지 돈은 구겨진 그 자태에서 펴질 줄을 몰랐고, 돈을 세는 안경사는 한 장 한 장 만두피 뜯듯 뜯어가며 7만원임을 확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이다. 만 원 남았다"

안경점을 나오면서 남편이 들릴 듯 말 듯하게 속삭였습니다. 5천원은 깎아주더라네요.

이틀 뒤에 안경을 찾기로 하고 집으로 오는데 남편이 고맙기도 하면서 도저히 돈의 출처가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그래서 물었죠. 그런데 남편은 "오늘 저녁은 남은 돈으로 외식이나 할까?" 하면서 흙먼지가 눌러 붙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 걸로 저의 궁금증을 일축시켜버렸습니다.

이틀 뒤 안경을 찾아왔는데 필요 없는 척, 굉장히 알뜰한 척, 남편 앞에서는 돈 몇 푼 때문에 싫은 척을 했지만 그동안 안개 속처럼 못보고 살아온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은 7만원 그 이상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이제껏 가락지 한 개도 나눠 끼지 못하고 시작한 결혼생활에서 남편이 제게 준 것이라곤 제 다리에 매달려 엄마의 안경을 한번 써보자고 아우성치는 두 아이 외에는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그저…. 이 다음에 부자 되면 그땐 날마다 콩알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달라는 말로 남편의 미안함과 저의 서운함을 달랬었는데.

남편이 그 돈을 얼마나 힘겹게 모았을지 알면서도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서 뭔가를 받는다는 게 그렇게 큰 기쁨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엊그제 일처럼 처음 안경을 귀에 올렸을 때의 그 감동과 고마움이 지금도 이렇게 생생한데 어느새 일년이 훌쩍 지난 추억이 되어있네요.

그런데 남편이 길 잃지 말고 집 잘 찾아오라고 이 안경을 맞춰줬는데. 저는 아무래도 타고난 길치였던가 봐요. 안경을 쓰고도 여전히 백 번도 넘게 다녔던 골목길을 혼자서는 찾아가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지난 일년 새 남편도 눈이 많이 나빠졌나 봐요. 먼발치에 보이던 작은 간판까지 다 읽어내던 그 눈이 지금은 커다란 간판도 눈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도 못 읽어내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남편에게 안경을 하나 맞춰주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했고, 곁눈질 한번 안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에서…. 저도 그 동안 생활비를 아껴서 비상금 쬐금 모아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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