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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저녁, 여느 때처럼 아내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차를 몰았다. 겨우 시간에 맞추어 아내의 직장 앞에 차를 대 놓고 한숨 돌리고 있자니 아내는 엉뚱하게 근처 슈퍼에서 나오고 있었다. 보나마나 조금 일찍 퇴근해서 저녁 찬거리를 본 모양이었다.

아내가 차에 타고 얼마 있지 않아 김치 냄새가 났다. 한동안은 어머니를 통해서 김치를 조달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드디어 자신이 직접 김치를 사다 먹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김치 샀구나?"
"오늘 아침에 쉰김치까지 다 먹었잖아."
"그런데 꽤 많이 산 것 같네."

아내가 손에 들고 있는 봉투는 하나가 아니라 두 서너개 정도는 되어 보였다. 김치 말고 콩나물이나 호박, 양파나 감자 같은 것도 산 것 같았다. 내 생각 같아서는 아내가 산나물이라도 한 종류 사서 맛있게 무쳤으면 좋으련만 여지껏 이런 경우가 좀처럼 없었으니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욕심일 뿐이었다.

하긴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파김치처럼 늘어지는 아내에게 내 입맛에 맞는 반찬을 요구하는 게 어찌 보면 사치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왕 만들 반찬이라면 남편의 식성을 고려해서 수고를 하면 더더욱 좋겠다는, 조금은 얌체같은 생각도 해 본다.

아무튼 그날 저녁 때에도 나는 집에 오자마자 서둘러 밥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어째 이날은 밥상 위의 메뉴가 좀 낯설게 보였다. 김치는 저녁 찬거리로 아내가 시장에서 사왔음은 익히 아는 바이지만 아침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무생채며 메추리알, 깍두기, 오징어 젓갈 등은 대체 어디서 불쑥 튀어 나왔단 말인가?

"이 반찬들은 뭐야?"

내 물음에 아내는 대답이 없고 대신에 큰녀석과 막내가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

"우와! 나 이 새알 참 좋아하는데, 내가 이거 다 먹어야지,"
"형아는 욕심쟁이야, 왜 혼자만 먹을려고 그래."
"넌 저기 지렁이 같이 생긴 거나 먹어."
"싫어, 형아나 저거 먹어라."

두 녀석은 이렇게 떠들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평소 같으면 정신없이 숟가락질을 하고 있을 제 아빠가 이날따라 아직 첫 숟갈도 뜨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모든 반찬들을 사 먹었는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아직 제 엄마 음식 솜씨도 제대로 모르는 녀석들을 키우면서 말야."
"요즘 좀 피곤해서 그래요. 몸도 왠지 안 좋기도 하구."
"아무리 그래도 반찬 하나 직접 만들지 못해?"
"......"

난 몇 번 숟가락질을 하는 척 하다가 이내 밥상에서 물러나 앉았다. 왠지 아내가 조금 꽤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야 평소 담가 먹기가 어려우니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반찬들은 다 뭐냐 말이다.

아내는 뒤늦게 된장찌개를 들고 밥상 앞에 와 앉았다. 저녁 밥상에 올라온 먹을거리 중 유일하게 아내가 만든 거였다. 아내도 골이 났던지 나한테는 더 먹으라는 소리도 없다. 아내의 숟가락질이 묵묵히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심술이 났다.

더 이상 옆에 있다가는 나만 약이 오를 것 같아 아파트 베란다로 나왔다. 이럴 때는 그저 소리라도 한바탕 질러야 되는데 저녁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상태라 그럴 기력도 나지 않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밖을 내다 보고 있으려니 큰녀석이 베란다 유리창 문을 열고 나와서는 냉큼 소리쳤다.

"아빠, 엄마가 시금치 무칠 테니 빨리 들어와서 식사하시래요."

녀석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고맙기는커녕 애 엄마 심보가 더더욱 고약하게 생각되었다. '그럴 거면 진작에 나물이라도 하나 무쳐서 올려 놓을 것이지 지금 와서 저러는 건 또 뭐람?'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삐쳐서 저녁밥을 굶는다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얼핏 들어 못 이기는 척 들어가서 다시 밥상 앞에 앉았다. 이윽고 아내가 시금치 무친 접시를 내려 놓으며 한 마디 한다.

"김치만 사려고 갔다가 이것 저것 먹을 만한 게 있어서 같이 샀어요. 이번 한 번만 먹어요."

아내가 이렇게 한수 접고 들어오는데 마음 넓은 사내인 내가 여전히 '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화답이라고 한 말이 엉뚱하게 이런 말이었다.

"그래, 알았어. 대신에 앞으로는 김치도 사 먹지 말고 우리가 직접 담가서 먹자."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자 어쩐지 헛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한 번도 김치를 담가 먹은 경험이 없는데 갑자기 어떻게 김치를 담근단 말이냐?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비빌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몇 번 어머니께 가서 김치 담그는 방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아내나 나나 건성으로 배운 터라 지금까지 써 먹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긴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운답시고 가서는 기껏해야 옆에서 어머니 일손이나 거들었지 아내나 나나 진중하게 배울 자세는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대로 김치 만드는 거야 아내 몫이니 신경도 쓰지 않았고 또 아내는 아내대로 아쉬우면 언제든지 시중에서 사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신경써서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이런 내 생각을 미리 넘겨 짚고 아내가 말했다.

"또 어머니한테 부탁하려고 그러구나?"

나는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맞아. 그렇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확실하게 배워서 오자, 알았지?"

아내는 내 말에 대답은 않고 알 듯, 모를 듯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어쨋든 그렇게 해서 또 한바탕 벌어질 뻔했던 우리 부부의 싸움은 결국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대신에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 시간을 우리 부부는 장터에 가서 배추며 무며 양파며 기타 등등, 김치 담글 재료를 구하느라 정신없이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이 늦은 시간까지 배추를 씻고 다듬고 해서 겨우 재어 놓았다. 내일 당장 어머니께 가서 맛있게 김치 담그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이번에는 어째 확실하게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하긴 이번만큼은 예감에서 그치면 안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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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기자'라는 낱말에 오래전부터 유혹을 느꼈었지요. 그렇지만 그 자질과 능력면에서 기자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의구심으로 많은 시간을 망설였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끝에 내린 결정은 일단은 사회적 목소리를 들으면서 거기에 대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생각도 이야기 하는 게 그나마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필요치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습니다. 그저 글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고 책임감있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는 글쓰기 분야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일상의 흔적을 남기고자 자주 써온 일기를 생각할 때 그저 간단한 수필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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