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최장수 왕이자 최고 재위 기록을 남겼던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元陵)은 건원릉에서 서쪽 두 번째 줄기에 자리잡고 있다.
영조(1694~1776)는 52년간 왕위에 있었고 83세까지 장수한 왕이다. 오래 왕위에 있었던 만큼 탕평책과 균역법, 현재 복원 중인 청계천 준설 등 치적도 많지만,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소생이라는 탄생부터 시작해 경종 독살설에 휘말리며 왕위에 올라 사도세자의 죽음까지 드라마틱한 사건을 많이 남겼다.
원릉은 현재 정자각과 비각을 보수 중이다. 원릉을 천천히 오르면서 영조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생각해본다.
병약했던 경종이 국가의 종묘사직을 이어갈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숙종은 다음 왕통을 잇게 할 왕자로 연잉군(영조)를 지목한다. 숙종43년 숙종은 좌의정 이이명과 독대를 하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대리청정을 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독대라는 건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다니면서 기록했던 사관을 물리치고 왕과 단둘이 만나는 일이다.
당시 조정은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던 노론으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노론이 훨씬 우세했다. 이 독대 사건이 빌미가 되어 경종이 즉위하자 다음해 노론은 숙종의 유지라며 연잉군을 왕세제로 하라고 주장했고 연잉군은 왕세제로 책봉된다. 노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종이 병석에 눕자 왕세제 대리청정까지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내심 왕세제 대리청정을 사양해주길 바랐던 경종은 연잉군이 승낙하자 이를 괘씸하게 여겼고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에게 사태수습을 명한다. 이 사건이 바로 '경종 시해 사건'이며 임인옥사다.
소론이 벌인 임인옥사에서 왕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의 4대신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되고 170여명이 처벌을 받는다. 이때 연잉군도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고 이제 경종 시해 사건에서 연잉군의 목숨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다.
피바람 부는 임인옥사를 본 연잉군은 죽음의 공포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고 왕대비였던 계모 인원왕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겠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그러자 영조를 아끼고 사랑했던 인원왕후는 경종에게 언문으로 간절히 목숨을 살려주라고 써보낸다.
아들이 없던 경종 역시 평소에 연잉군을 아끼기도 했지만 연잉군을 죽일 수도 없었다. 자신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판에 단 하나 있는 왕자인 연잉군을 죽인다면 현종부터 외아들로 3대를 이어 내려온 왕통을 이어갈 계승자가 없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자신을 지지해주던 노론이 거의 다 화를 당했던 임인옥사 이후 영조는 경종이 죽기까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을 것이다. 즉위한 후에도 게장과 감을 권해서 경종이 죽었다는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던 영조는 소론을 제거하고 노론을 등용했다. 그러나 노론이 소론에 대한 과거 숙원을 보복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자 삼사의 대신과 좌의정 홍치중, 우의정 이의현 등을 파직해버리고 소론을 등용한다. 이것이 영조의 유명한 탕평책의 시작이다.
그러나 정계에서 물러났던 남인을 다시 등용하고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등용해 국왕이 중심이 된 인재등용을 목표로 한 영조의 이러한 탕평책도,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히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굶어죽는 비극을 일으킨다.
남인과 소론은 사도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사도세자는 노론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를 눈치챈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윤급 등의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적어 영조에게 일러바친다.
왕이 세자를 죽인 일은 조선왕조에서 두 번 일어났는데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굶어죽게 만든 일이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신임해서 자신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앉힐 거라는 의심을 했고, 늙은 영조 역시 그런 의심을 갖고 있는데다가 정성왕후가 죽고 새로 얻은 젊은 왕비 정순왕후가 거들고 속살거린 이 모함에서 아들을 죽이는 비극을 저지른 것이다. 더구나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마저도 뒤주에 갇혀 죽음에 처한 사위를 외면했다.
조선왕조에서 왕이란 용으로 상징했다. 용안이나 곤룡포, 용상 등 왕과 관계 있는 것은 모두 용과 관련된다. 왕이 즉위하면 용이 새겨진 의자인 용상에 앉는다는 말로 비유했다. 용은 두 마리가 있을 수 없고 단 하나의 용만 존재한다는 것이 당시의 철칙이었다. 권력을 왕권에 몰아주는 체제에서 아들조차도 경쟁자로 보기에 이런 비극이 나타났을 수밖에.
이것이 어찌 조선왕조뿐일까. 중국도 마찬가지였고 절대왕권을 가진 왕조는 거의 다 그랬다. 권력이 대체 뭐길래 이런 역사가 순환되는 것일까.
영조의 의심 많고 신중한 성격은 영조를 장수할 수 있게 했지만, 아버지가 죽는 비극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에 의해 생전에 잡은 정성왕후의 홍릉 신후지지에 묻히지 못하고 이곳 동구릉으로 떠밀려 온다.
왕좌에 있으면 은혜도 잊는 것인지 영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계모 인원왕후를 능호조차 생략하고 명릉에 곁방살이 신세로 남게 했다. 결국 인원왕후를 박대하고 자신이 묻힐 신후지지를 만든 영조가 효종 파묘자리에 묻힌 것은 인과응보라고 할까. 경종이 죽자 경종의 왕릉 택지로 천거됐던 이 자리는 영조가 국장에 어떻게 파묘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곳이기도 했다.
원릉의 장명등은 숙종 이후의 양식에 따른 사각형 석탑이고 무인석과 문인석은 홍릉의 석물과 닮아 있다. 소심하다 싶은 문인석의 얼굴과 전혀 군인답지 않은 무인석의 모습은 영조를 상징하는 듯싶다.
정순왕후와 천주교 박해
영조의 곁에 잠들어있는 계비 정순왕후(1745~1805)는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와 사도세자의 죽음에 한 몫 했고 떠들썩하게 피바람을 몰고 온 왕비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죽고 나자 11세의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들어간다. 자신의 친정집안 경주 김씨 친인척을 요직에 앉히고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다. 다섯 집을 서로 감시하게 하고 한 집이라도 천주교신자가 나오면 모두 화를 입는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천주교 박해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신유사옥이라 하는 천주교 박해는, 겉으로는 평등사상을 골자로 하는 천주교 교리가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군신상하 관계가 기본인 조선의 전통체제를 흔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남인과 실학자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계략이었다.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벽파가 천주교에 개혁주의자였던 실학자와 남인이 많다는 것을 이용해 시파를 없애려고 벌인 피의 숙청이었다. 결국 정권다툼을 위한 당쟁이 천주교박해의 원인이었다.
이때 정약종, 권철신 등 남인들과 은언군(철종의 할아버지)이 처형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유배됐다. 신유사옥으로 처형된 천주교도들은 300명이 넘는다. 이 천주교 박해는 안동 김씨가 집권했을 때도 계속됐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들을 몰살했고, 영조와 함께 찬란한 문화부흥기를 이뤘던 정조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정순황후 이후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관습처럼 자리잡아 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정순왕후에서 비롯된 세도정치 시대에 왕들은 숨을 죽이고 구석에 숨어있었으며 왕비들은 외척을 앞세워 전권을 휘둘렀다.
조선을 전성기에 올려놓은 영조와 영조가 이룬 치적을 하루아침에 말아먹은 정순왕후의 대조적인 모습은 극과 극을 보이고 있어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뿐이랴. 정순왕후의 천주교 박해로 죽은 은언군의 손자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정순왕후도 이는 미처 예측하지는 못했으리라.
정순왕후는 순조5년 61세로 죽어 영조 곁에 묻혔으나 순조의 왕비인 김조순의 딸 순원왕비가 세도정치의 바통을 이어받아 안동 김씨의 세상이 시작된다. 덕분에 죽어난 건 이 땅의 불쌍한 민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