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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7세기 전반에 살았던 초기 그리스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의 한 시구에 이런 표현이 전해진다.“여우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103; poll' oid' alopex, all' echinos hen mega).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를 지냈던 철학자요, 전기 작가로 활동했던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 경(卿)은 그의 글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1953)에서 인간을‘고슴도치’와 ‘여우’ 두 유형으로 구분했다.

여우는 <많은 것을 두루 알고 있는> 사람의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으로 또스또엡스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만을 깊이 아는> 사람의 유형으로 톨스토이, 플라톤, 단테가 이 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물론 벌린 경(卿)이 주로 논의 주제로 삼은 대상은 대문호였던 톨스토이였다.

고슴도치는 <방어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어 수단만을 가지고 있지만, 여우는 여러 수단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벌린卿의 생각대로 플라톤은 고슴도치에 비교될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우에 비교될 수 있음직하다.

모든 것을 포섭하는 단일한 세계관에 흥미를 지니는 사상가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경험적 사실들의 다양성과 그 다양한 측면에 흥미를 보이는 사상가를 대비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플라톤이 항시 일반화에 자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측면을 고려하게 되면 그에게는 여우적인 측면보다는 고슴도치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아닌 게 아니라,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도했던 생물학적-경험적 자료들의 수집과 같은 작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플라톤은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우연한 사실들의 한갓 누적이나 실험적 연구가 아니라, 이 사실들을 포괄하여 하나의 체계적 통일로 묶어낼 수 있는 하나의 관념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양자는 학문방법상의 차이뿐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고슴도치와 여우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

삼성 재벌 산하의 배동만 제일기획 사장이 전하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경영철학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회장의 경영 철학에 따르면 - 최근에 명예 철학박사까지 받았다니 <경영철학>이란 말을 붙여주기로 하자. - '방어형의 고슴도치 경영'과 '공격형의 여우 경영'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전해진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8월 아테네 올림픽 때 이건희 회장을 수행하던 중 만찬자리에서 ‘고슴도치와 여우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 회장은 ‘앞으로의 경영은 고슴도치 경영과 여우 경영이 믹스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온몸에 돋친 가시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방어적인 고슴도치 형과 공격적이고 꾀 많은 지략가 스타일의 여우 형을 적절하게 혼합, 기업의 유지 및 성장 전략을 조화롭게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수성(守成)만 생각하다 보면 성장을 못하고, 성장만 생각하다 보면 수성을 못하게 된다”는 의미쯤으로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슴도치와 여우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 이거 재미난 질문이다. 실제로 고슴도치와 여우가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어릴 적 아이솝(이솝) 우화에서 읽은 짧은 지식에 의하면 단순하고 우직하고 못 생긴 고슴도치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여우에게 항상 승리한다.

부산일보 정보화 컬럼(2004. 03.19)을 쓴 정현민씨는 이솝의 우화를 끌어들이면서 정보화 시대에는 고슴도치형의 리더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고슴도치는 결코 멍청한 게 아니다. 그는 세상이 제 아무리 복잡하건 관계없이 모든 과제와 딜레마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순화시킨다. 고슴도치형 인간은 복잡성을 뚫고서 그 바탕에 깔린 패턴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주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인 것을 보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유능한 최고 관리자는 여우보다 고슴도치처럼 큰 것 한 가지만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초점을 맞추어 큰 것 한 가지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킨다. 여우처럼 다수의 목적을 추구하면 갈등이 생기고 관리상의 초점이 흐려지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궁금한 것은 그 동안 이건희 회장 자신은 여우였을까? 아니면 고슴도치였을까? 하는 것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생각에 따르면, 여우적 경영과 고슴도치적 경영이 서로 싸우면 안 되고, 상호보완적으로 조화하면서 기업 경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로 이해된다. 여기에다 잊지 말고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일게다.

단지 고슴도치와 여우가 가지고 있는 방어 수단적 측면만을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큰 것>과 여우의 <작은 것>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대기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기업가의 정신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점이다.

이 회장의 경영철학을 전하는 배동만 사장은 황우석 교수와 같은 한 우물을 파는 학문 정신을 강조하면서, 한 가지 일에 열정과 혼을 기우리는 황 교수 정신이 “우리 사회에 보다 널리 퍼진다면 일류 인재, 일류 상품은 훨씬 더 많이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지혜는 실패를 해 봄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며 "움직이는 기업이나 다름없는 박찬호, 김병현, 최희섭, 골프 선수들 같은 사람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가진 <큰 능력>을 소유한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 주장은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여우보다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는 고슴도치>와 같은 인재를 키우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앞서 여우적이면서도 고슴도치적인 경영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만일 이 주장이 인재를 기르는 경우에도 삼류적 인재보다는 일류적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역시 앞서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은 아닌지 의아스럽다. 내 생각에는, 지금까지 삼성 이건희 회장의 회사경영 방식이 <모범>이 된다면 이회장은 여우적이기보다는 고슴도치에 가까운 경영자가 아니었을까?

만일 모범이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작은 것>에 집착해 <큰 것>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측면일 것이다. 사회는 특정한 한 사람의 능력에만 의존해서 발전해서는 안 되고 다수의 합의와 여러 복합적 사회적 가치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

모든 사회적 가치는 사회 전체 구성원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다수의 합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삼성이라는 특정한 한 기업이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한 사회가 나아갈 지향적 가치와 방향을 전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그 가치 체계에서 소외된 구성원들의 불만은 날로 쌓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모아져 전체 구성원의 의사가 반영되는 사회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마땅하다.

삼성이 다수의 이익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윤의 극대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만 주어진다면, 그래서 전체 구성원에 대해 확실한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는 확실성만 담보될 수 있다면, 아마도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정치 사회적 문제들은 불거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백번이고 삼성의 기업 경영 방식에 손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 한 순간에 삼성이라는 거대한 기업경영 체제가 삐걱거리게 되는 상상하기 어려운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면, 그 위기의 순간을 극복할 방어 수단이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사회적 통제 수단을 대안으로 제시해서 그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삼성 이외의 다른 방어 수단이 없는 경우에, 삼성이 흔들리면 국가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사회 구성원 전체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방책이 필요하고, 그 방책은 구성원 전체의 합의에 기초해서 만들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국가가 위기에 봉착한 순간에도 삼성 이외의 국가 전체를 보호할 만한 다른 대안적 대처 수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삼성이 표방하는 <인간 경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큰 것 못지않게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철학을 실천하는 대기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왕 여우 유형의 삶의 방식과 고슴도치 유형의 삶의 방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그간 실천하지 못했던 <무노조 삼성>의 이미지부터 깨버려야 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고, 강한 자들이 약자들을 밀어내고, 더욱 더 약자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은 기업 경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노조를 구성하려는 사람을 핍박하고, 보장되어야 할 사생활을 파헤치는 일 따위도 집어쳐야 할 것이다.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면서 재산을 상속하는 일 따위의 작은 경영에 매달릴 일도 아니다.

큰 것과 작은 것을 다 고려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태도, 고슴도치와 여우와 같은 인간의 유형이 함께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도록, 이 회장의 주장이 적극적으로 삼성 경영에 적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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