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소니 교통사고로 병실 생활을 한 지 벌써 4개월째. 이렇게 오래도록 병실 생활을 한 적이 과거엔 없었다. 1987년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온몸이 핏덩어리가 되는 상당한 출혈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2개월 동안 입원하고 통원 물리치료를 받았다. 범퍼에 부딪친 무릎이 타박상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무릎 뼈가 깨졌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 반월상이 갈기갈기 찢어졌기 때문이다. 다친 왼쪽 다리를 조금 들 수 있을 정도이며 아직도 보조기를 착용하고 목발을 짚고서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내가 입원해 있는 작은 의원은 내가 사는 집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간호사들이 친절하고 환자들이 한 가족처럼 정(情)을 나누며 지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가 있는 병실의 40~50대 초반 환자들은 책 읽기와 신문 읽기를 좋아하여 전화 통화하는 일을 빼놓고 나면 아주 정숙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병실이 이상한 공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인근에 주택가가 있지만 작은 술집과 노래방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밤만 되면 창문으로 들려오는 취객들의 소음에 시달려야 한다. 병원 근처를 지나는 취객들이 자신이 아파 보지 않아서 환자들을 괴롭히는 것일까.
낮에도 귀가 힘들 때가 자주 있다. "감자, 양파 사요!"하는 용달차 행상인의 녹음 소리, 병실 양옆으로 환자와 방문객들의 웅성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무슨 할 이야기들이 그리도 많으신지, 쉬지 않고 객론들을 하고 있다.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 휴게실에선 젊은 환자들이 모여 앉아서들 무슨 PC 오락을 하는지 시끄럽기가 돗대기 시장 같다.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 정보검색을 하는 취향이 전혀 없는 데다, TV를 보는 일에도 식상해서 그런 것일까.
귀가 막히지 않은 이상 어쩔 수 없이 어수선해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정찬주의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책을 펼쳤다. '암자에서 만난 성철 스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성철 스님은 암자에서 무엇을 공부했나?'라는 화두(話頭)가 이 책이 독자에게 선물하는 숙제다.
불교문학으로 일가를 이룬 소설가 정찬주의 작품은 발로 만든 불교경전 같다. 그동안 펴낸 <암자로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나를 찾는 붓다 기행>,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선방 가는 길> 등의 명상적 산문과 <산은 산 물은 물> 등의 불교소설 모두 수많은 답사 끝에 일궈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걷고 또 걸어서 일구어낸 암자에 관한 새로운 발견과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듯싶은데, 올해 석가탄신일(5월 15일)을 열흘 앞두고 펴낸 <자기를 속이지 말라> 역시 답사하는 곳마다 남겨놓았을 발자국이 행간에 보이는 듯하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에는 평생 누더기 장삼만을 입고 '자기를 속이지 않는 삶'을 살았던 성철스님의 진면목이 빼곡히 담겨 있다. 성철스님이 수행을 하고 공부를 했던 암자들을 찾아다니며 그의 정신을 느끼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1부 성철 스님 암자 기행'에 이어 '2부 어둔 마음 밝히는 성철 스님의 말씀'을 함께 엮었는데, 정찬주는 실제로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날마다 테이프로 다시 들으면서 어둡던 방안에 백 개의 해가 뜬 것처럼 환하게 밝아진 걸 경험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1994년 어느 날 아침, 숙취 상태로 성철 스님의 사진이 있는 신문을 보았을 때 방안 천장에 비쳤던 환한 빛을.
성철 스님은 백련암의 제자에게 "속이지 말그래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하며, 저잣거리 어떤 단체의 실무자가 기념 삼아 간직하겠다며 한 말씀 간청하자 '불기자심(不欺自心)'이라는 말을 써주었다고 한다. 직역하면 '자기를 속이지 말라'. 의역하면 '자기와 한 약속을 지키며 살라'.
요즘 이광재 국회의원이 <자기를 속이지 말라>를 자기 자신에 대해 반추해 보고 싶어서 읽고 있다고 하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보았다. 정찬주가 발과 마음으로 공들여 쓴 책 <자기를 속이지 말라>. 마음이 어수선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영혼이 없고 정신이 비어 있는 채 오로지 육체만으로 시끄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하다 보면, 멀쩡한 사람의 어수선한 머릿속은 아예 수세미처럼 뒤엉켜 버릴 것이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로 어수선한 마음 다스리기. 자기 자신을 돌아볼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내일은 외출하여 집에 있는 헤드셋을 가져와야겠다. 다리가 유쾌하지 않으니 얼마쯤 더 병원 신세를 져야 할 터, 그것으로 소음을 막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책읽기에 주력하련다.
덧붙이는 글 | <자기를 속이지 말라> 정찬주 씀/2005년 5월 4일 열림원 펴냄/210×151mm/268쪽/값 9800원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생명 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주로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신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하반기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