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장을 부려도 좋을 휴일 아침이지만, 휴일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달려가는 곳이 있다.
"혹시, 당신 산에 미쳐 버린 것이 아냐?"
잠꾸러기 아내가 주섬주섬 등산 장비를 챙기는 것을 보고 남편은 핀잔을 주듯 한마디 건넨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의 말투는 무리가 아니다. 아내가 벌써 3주일째 휴일 아침마다 한라산에 가자고 졸라댔으니 말이다.
"글쎄! 당신도 함께 미쳐 볼래요?"
바쁜 남편의 하루 계획을 잘 알면서도 넌지시 남편의 얼굴을 살피는 아내. 한동안 머뭇거린 남편은 "벌써 3주째야?"라며 딴청을 부린다.
무아지경 영실기암
영실기암 신록은 벌써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소나무 숲에서는 찌리륵-찌르륵, 꼬르륵-꼬르륵-. 흉내도 낼 수 없을 새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깊은 계곡 속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도 지나간 시간들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세월의 유수를 실감케 한다.
산은 말이 없는데도 나는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걸까?
새들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숲길을 인도하는 키 작은 조릿대에게도 '꾸벅' 인사를 한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 우두커니 서 있는 기암괴석에도 손을 흔들어 댄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무심하게 있는데도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요동을 치는 걸까? 정말이지 남편의 말처럼 산에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한라산의 심장, 병풍바위를 지나며
한라산 심장은 역시 병풍바위다. 정교하게 깎아 세운 돌 틈마다 초록의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한 장의 수채화, 계절의 초상화 같다. 병풍바위 머리 위엔 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철쭉이 만발한 꽃불은 1주일 전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능선을 타고 내려온 꽃 소식은 산 아래로 울려 퍼지고 있다. 마치 병풍바위는 철쭉꽃 핀을 머리에 꽂고 있는 소녀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밟고 올라가는 계단 아래 끈질기게 피어 있는 하얀 꽃, 주목나무 아래 살며시 얼굴을 내 밀고 있는 보라색 꽃잎, 서로가 상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연의 이치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비와 벌을 유인하고 있는 꽃들의 향기가 산을 에워싸고 있다.
한라산에 미쳐 있는 산 사람들
사람들은 이 기분을 누리기 위해 산에 오르나 보다. 앞을 바라보면 까마득한 목적지, 뒤를 돌아보면 땀으로 얼룩진 발자국.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 같다.
아슬아슬 깎인 산허리에 산 마니아들이 카메라 초점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 한 컷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깎아 세운 벼랑 끝에 앉아 있는 사진사들을 모습이 한없이 진지하다.
오르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 능선마다 사람들의 행렬로 가득 메웠다.
노루샘에는 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모금의 산수가 얼마나 간장을 써늘하게 하는지, 갈증 끝에 마시는 한 모금 물의 고마움을 느껴보는 순간이다.
선작지왓 철쭉동산 꽃잎은 지고
지난주에 철쭉으로 정원을 이뤘던 선작지왓은 벌써 그 흔적이 사라졌다. 그 정원이 그리워 다시 찾아왔건만, 그리움의 그림자는 흔적마저 남기지 않고 산 아래로 이동하고 말았다. 선작지왓의 철쭉꽃이 영원히 혼불을 태워주리라 생각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가?
그리움은 늘 가슴속에만 남아 있거늘, 1주일 전 꽃동산을 찾아 숨을 헐떡거리며 찾아온 나는 역시 산에 미쳐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산에 오를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미친 듯이 오르면 능선이 보이고 그 능선 사이로 펼쳐지는 해안선과 바다, 오름의 풍광, 그리고 옷깃을 스치는 산 사람들의 표정 속에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월 29일 한라산 영실에 다녀왔습니다. 오는 6월 5일(일)은 어리목 코스를 택할 예정입니다. 어리목 코스 사제비 동산에는 지금 철쭉이 장관을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