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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에 몇 번 헹궈낸 국수를 바구니에 건져 놓곤 딸아이의 국수를 먼저 만들었다. 딸아이는 국수에 진간장과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비벼주어야 한다. 다음으로 내 국수를 만들 차례. 열무물김치 국수 만드는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삶아 놓은 국수에 열무물김치만 듬뿍 얹으면 되었다. 김치 통 뚜껑을 열었다. 발갛게 잘 익은 열무 물김치의 국물 색깔은 가히 예술이었다.
그릇에 삶아 놓은 국수를 담고 그 위에 열무물김치를 얹었다.
토요일 오전. 나는 아이와 함께 그렇게 아침상에 앉았다. 아이 앞에는 진간장과 참기름과 깨소금에 비빈 비빔국수가, 내 앞엔 열무물김치 국수가 놓여 있었다.
"복희야! 어서 먹어."
그런데 아이가 주저하며 냉큼 젓가락을 들지 않고 있었다.
"왜 국수 먹기 싫어? 그럼 밥 줄까?"
"아니. 그게 아니고. 아빠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아빠는 아침도 안 드셨을 텐데."
"…"
새벽 일찍 일터로 나간 남편이 어떻게 아침은 먹었는지 미처 챙길 생각조차도 못한 나는 그 순간 아이 앞에서 어찌나 부끄럽던지 고개가 자꾸만 밑으로 숙여지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들다말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아침은 먹은 거야?"
"응. 먹었어."
일이 바쁜지 남편의 두 마디가 채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화기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곁에서 남편과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딸아이가
"아빠 아침 드셨대?"
까만 눈망울을 곱게 깜빡거리며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응. 아빠도 아침 드셨대. 그러니 복희도 어서 먹어."
그때서야 젓가락을 들고 국수를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 딸아이가 한없이 예뻤다.
'이런 맛에 자식 키우는 건가.'
잔잔한 감동이 내 가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한참 맛있게 국수를 먹는 아이를 바라보다 나도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정말 혀끝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었다. 열무의 아삭아삭한 맛과 물김치의 시원한 국물맛과 국수의 쫄깃쫄깃한 맛이 한데 어우러져 아주 환상적인 감칠맛을 내고 있었다.
한데 어우러진다는 거. 섞여서 더 훌륭한 맛을 낸다는 거. 그게 바로 열무물김치 국수의 진정한 맛이 아닐까? 거기다 아빠를 생각하는 딸아이의 고운 마음으로 이미 가슴은 감동으로 넘쳐나고 있었으니 그 열무 물김치 국수가 더 맛있던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말에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부러울 게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제 아침 딸아이로 인해 한없이 따뜻해진 가슴과 시원한 열무 물김치 국수로 포만감에 젖었던 그 순간, 나는 내 인생 속으로 순간순간 틈틈이 비집고 들어오는 행복이란 것에 감동하고 있었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우리네 사는 삶이란 것은 거창하지 않은 것에서도, 아니 참으로 별 것 아닌 것에서도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