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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아마도 남도에서는 보리 베기가 한창일 것이다. 지난날 농가에서 6월 한 달은 엄청 바빴다. 보리 추수와 모내기가 겹치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던 그 시절(1950~60년)에는 이맘때면 학교에서조차 가정실습이라고 하여 바쁜 농사일 도와주라고 한두 차례 사나흘씩 쉬었다.
낙동강을 낀 내 고향에는 보리농사를 엄청 많이 지었다. 보리를 추수해야 허기를 면할 정도로 보리는 농가의 주식이었다. 벼농사도 많이 지었지만 공출이다, 물세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관에다 바치고 남은 곡식은 팔아서 자식 학비로, 가용으로, 다음해 농비로 썼기에 농사꾼들은 조상 제삿날이나 이밥이라 하여 흰 쌀밥을 먹었을 뿐이다.
“계집아이는 태어난 뒤 쌀 한 가마니도 먹지 못하고 시집간다”고 할 만큼 쌀은 소중한 양식으로, 요즘의 세태로는 ‘믿거나 말거나’한 시절이야기였다.
또 보리농사는 벼농사보다 짓기가 더 힘들고 손도 많이 갔다. 늦가을 벼를 베고 난 논이나 가을걷이를 한 밭에다가 보리를 심는다. 눈을 이불삼아 겨우내 자란 보리는 긴 봄날을 보내면서 자란다. 봄철에는 한창 잡초들이 왕성하게 돋을 때라 두어 차례 손으로 일일이 김을 매줘야 한다.
보리이삭이 팰 무렵은 ‘보릿고개’라 하여 농촌에서는 집집마다 양식이 떨어지는 춘궁기로 몹시 힘들 때다. 먹을 게 없는 농사꾼들은 풀뿌리 나무껍질도 벗겨다가 먹었다. 특히 소나무 껍질을 많이 벗겨 먹었는데 그놈이 위로 들어가서 창자를 지날 때는 물기를 많이 빨아 들여서 항문을 지날 때는 몹시 아팠다.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보리는 타작도 벼보다 훨씬 힘들다. 보리를 베어 2~3일 말리고는 굵은 새끼줄로 보리 단을 감은 뒤에 그놈을 어깨너머로 둘러맨 다음 맷돌 같은 돌에다가 내리친다. 그러면 보리의 낱알이 마당에 떨어졌다. 그런데 보리이삭에는 까칠한 수염 같은 게 달려서 보리타작을 하노라면 그놈이 속옷 사이로 들어가서 여간 따갑지 않았다. 이렇게 1차 추수가 끝나면 다시 타작한 보리 짚을 모은 뒤에 도리깨로 두들겨서 남은 낱알을 거둬들였다.
아무튼 힘이 들어도 보리만 추수하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돼지나 소들도 보리를 빻을 때 나오는 등겨로 그들조차 주린 배를 채웠다. 이렇게 소중했던 보리가 쌀이 남아돌게 되자 슬그머니 들판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흔했던 보리밭도 이제는 아무 데서나 보기가 쉽지 않다.
한 여인의 평생 회한
며칠 전, 한 산골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강원도에서는 무척 드문 보리밭을 보았다. 6월의 태양 아래 한창 보리가 익고 있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에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더욱 지난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어느 해 우리 집 산골 보리밭을 베던 일꾼이 마침 새참을 가져간 나를 불렀다. 그곳에 가 보니까 아담한 둥지에 꿩알이 대여섯 개 있었다. 아마도 까투리와 장끼가 여기서 사랑을 나눈 뒤 둥지까지 튼 모양이었다. 이 보리밭은 새들만이 밀애를 나누던 장소가 아니라 산골 젊은이들조차도 춘정을 못 이겨 찾았던 곳이다.
요즘 국도나 지방도를 지나면 곳곳에 비온 뒤에 죽순이 돋아나듯 모델이나 무슨, 무슨 여관 호텔들이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다. 이 불황에도 그런 집들이 줄어들지 않는 걸 보면 젊은이들의 밀애 전선에는 그제나 이제나 불황이 없나 보다. 이런 시설이 없던 옛날, 젊은이들의 밀애 장소는 보리밭, 삼밭, 물방앗간, 상여 집 따위였다.
한국 최초로 일백만 관객을 동원하여 영화의 붐을 일으킨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김명곤 분)이 금산댁과 정사를 나눈 장소는 밭둑이었고,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이 평생 처음으로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을 나눈 곳은 물방앗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들이 소곤소곤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면, 인물이 출중했던 처녀와 야학 선생이 삼밭에서 밀애를 나누다가 고무신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는데, 그 일로 결혼 뒤 파경을 맞았고, 소박을 놓은 신랑은 그 뒤 나라님이 되었다고 한다.
그 여인은 여러 절을 전전하면서 평생 회한으로 지냈다는데 소설 같은 이야기의 시작은 삼밭이었다. 그때가 한창 감자알이 굵어갈 때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이맘 때였으리라.
내가 악동 시절에는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하는 이 즈음이면 누구와 누가 보리밭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둥, 누구와 누구는 어느 개울에서 함께 멱을 감았다는 둥, 사실 반, 과장 반의 이야기가 여름밤을 수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산골에는 그런 에로티시즘을 나눌 젊은이들도 거의 없고, 보리밭도 삼밭도 물방앗간도, 상여 집도 멱을 감을 개울도 없다.
예사 때와 달리 내가 콧노래를 부르자 운전대를 잡은 아내가 웬일이냐고 물었다.
“보리밭을 보니까, 옛 생각이 나서.”
“나 모르는 보리밭에 얽힌 추억이라도 있나요?”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 <보리밭>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