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 제17조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생활 침해 실태는 헌법의 권위를 무색하게 만든다.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에 노출되는가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만 명의 신용정보가 유출되는 일이 허다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민의 사생활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국가기관마저 효율과 통제의 논리를 내세워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수집·관리·이용하는 현실이다.
2002년 7월, 국가인권위는 출범 이후 처음으로 개인정보 침해사건에 대한 결정을 발표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정신과 진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경찰청에 제공하고, 경찰청이 이를 수시적성검사 안전운행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운전면허 제한이나 취소를 위해 실시하는 적성검사 대상자 선정에 이용한 행위는 위법이며, 사생활 침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국가인권위의 권고에 따라 경찰청이 수시적성검사를 중지하고 관련 자료를 삭제하기에 이른 이 사건은, 개인정보 보호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했던 우리 사회에서 프라이버시권이 중요한 인권 현안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한국정신보건가족협회 송웅달(81) 회장은 바로 이 문제를 국가인권위에 진정한 사람이다.
경찰청은 2001년 11월과 2002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일련의 가입자 명단을 요청했다. 그러자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경찰청이 제시한 기준 1998년 10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38개월 동안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치매와 정신분열증으로 총 진료(투약)일수가 180일 이상인 사람 1만3328명에 대한 전산정보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병명, 질환판정일, 치료기관, 치료시작일, 치료종료일 등 자료를 제공했다. 경찰청은 이렇게 넘겨받은 자료를 수시적성검사에 활용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공공기관의개인정보보호에관한법률' 제10조는 '개인정보의 보유 목적 외의 목적으로 처리정보를 이용하거나 다른 기관에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자료를 제공한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자료를 이용한 경찰청은 실정법을 위반한 셈이다.
또한 경찰청은 객관적 검증도 없이 현재의 상태가 아닌 과거의 병력에 따라 일률적으로 수시적성검사 대상자 기준을 정함으로써 도로교통법까지 위반했다. 같은 법 제70조 제1항은 수시적성검사 대상자의 범위를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로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청의 지침에 따라 각 운전면허시험장은 수시적성검사 대상자에게 우편물을 발송했고, 한국정신보건가족협회엔 사생활 침해를 호소하는 전화가 폭주했다. 가족 모르게 정신과 치료를 받던 사람은 "내가 정신병자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가정파탄의 위기를 맞았다"고 털어놓았고,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이 '왜 치료사실을 외부에 공개했느냐'고 항의하고 있으니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도 여실히 드러났다. 실례로 대기업 K사에서 근무하던 사람은 "정신과 처방약을 먹는다는 사실이 전 직원에 알려져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고, 또 다른 치료자는 "수시적성검사 우편물이 이웃에 공개돼 이사를 해야 할 처지"라고 밝혔다.
수시적성검사로 인한 부작용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송웅달 회장은 곧바로 이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거친 뒤 피해자 14인과 함께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했다. 송 회장은 젊은 시절 보험감독원 직원으로 감사원 파견근무를 한 적이 있어서, 법률 해석에 남다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정신질환자들의 얘기를 듣는 순간 '과도한 공권력의 폐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송 회장이 이번 사건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보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고질적인 편견 때문이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정신질환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2004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18세 이상 64세 미만 국민의 14.4% 466만 명이 정신질환으로 이환될 수 있는 증상을 갖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정신질환자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정신질환은 감기처럼 흔한 질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정신병자와 정신질환자는 분명히 다른 개념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봐도 정신질환은 뇌에서 분비되는 전달물질 도파민의 양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거든요. 그러니까 약으로 적정량을 조정해 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병인 거죠. 선진국에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정신질환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지도 않을 뿐더러 끊임없이 차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단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정신질환에 문외한이던 송 회장은 17년 전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은 신발을 신고 음악실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야구방망이로 30대를 얻어맞고 실신한 뒤 대인공포증과 불면증을 앓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소식 앞에서 어머니는 교사직을 내던지고 아들 뒷바라지에 나섰으며, 아버지는 고심 끝에 원망스런 선생님을 용서하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아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복음성가 가수로 활동하는 걸 보면서 자신도 정신질환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송 회장. 그는 현재 정신과 진료를 받는 가족들을 위한 '아름다운 교회'의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5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