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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제 일 때문이이었습니다. 어제도 역시 비가 내렸습니다. 비를 훔씬 맞아 가며 비둘기 놈들이 파먹은 자리에 콩 모종을 옮겨 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제는 평소와는 달리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개울가에서 흙발을 씻고 다 낡은 고무신을 탈탈 털어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미안한 표정으로 부엌문을 열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본체만체 하며 아이들에게 한 소리 했습니다.
“이 눔 자식들이, 아빠 진지 드시라고 하지도 않고 지들끼리 먼저 먹구 있네.”
“당신 늦으면 그냥 먼저 먹으라고 하잖아 그래서 그냥….”
“그래도 그렇지, 말이라도 하고 먹어야지.”
“에이 참, 뭘 그런 거 갖구 그래, 어쩌다 한번 그런 거 가지구.”
아내의 얼굴색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자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무슨 소리여, 애들 버릇 잘못 들까봐 그러지,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구. 지들 아빠가 아니더라도 그러면 쓰나, 누군가 일하고 있는데 지들끼리 먹으면 안 돼지.”
아내는 뭐 그런 사소한 일에 화를 내냐고 했지만 사소한 일을 소중히 여기는 내 생각은 달랐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힘들게 일 하고 있는데 같이 먹자는 말 한마디 없이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는 일은 고집불통인 내 사전에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소한 마음자리들이 자칫 몸에 벨 수도 있으니까요.
“니들 말여, 아빠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옆에서 일하고 있는데 니들끼리 밥 먹고 그러면 안된다. 알았지. 잉.”
아빠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맞은 아이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자동으로 책을 펼쳐놓았습니다. 결국 그 일침은 아내를 향한 일침이기도 했습니다. 속이 상한 아내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속 좁은 나 역시 말문을 닫았습니다. 그날 그렇게 아주 오랜 만에 아내와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밤늦게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맥주 두 병을 사들고 들어와 사랑방에서 좀생이처럼 혼자서 홀짝홀짝 마셨습니다. 모처럼 만에 담배도 뻑뻑 피워댔습니다. 그냥 웃으며 좋게 말해도 될 것을 가족들에게 화냈던 것이 힘들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와 나는 별 말없이 웃는 얼굴로 마주대했습니다. 이제 우리 부부는 신경전을 벌이고 나면 시시콜콜 시비를 가리지 않아도 됩니다. 서로가 미안해하기 때문입니다. 서먹서먹한 둘 사이에 비가 억수 같이 퍼부어 댔습니다.
요즘 나는 하루도 밭일을 하지 않으면 몸뚱이가 근질근질 한데 오전 내내 밭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빗줄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컴퓨터로 영화 ‘시네마 천국’ 봤습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였지만 식구들과 함께 다시 보았습니다.
그 날 저녁밥상머리에서 화를 낸 것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문제도 있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2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늘 밭에서 살다시피 했던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어렸을 때 노을이 질 무렵이면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얼른 아부지 한티 가서 진지 드시라고 혀' 우리는 놀던 손을 놓고 밭 가까이 가기가 귀찮아 저만치에서 소리치곤 했습니다.
“아부지 진지 드세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먼저 밥숟가락을 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가부장적 권위를 상징하는 단순히 유교적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지 아버지에 대한 권위만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권위적이지 않다면 말입니다.
고향 마을에 신작로가 들어오고 밭들이 죄다 사라지면서부터 아버지는 밭에 나가시는 대신 술 마시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때도 역시 나는 술집 근처에서 아버지에게 소리쳤습니다.
“아부지 진지 드시래유!”
“그려, 그려, 우리 셋째가 이제 다 컸구나.”
술에 취해 있거나 하루 종일 밭에 나가 7남매 자식들 먹을거리만큼 힘들게 일하시면서도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아부지’. 요즘은 밭고랑 어디에서도 ‘아부지 진지 드세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 한가운데에서는 ‘거시기네’ 형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밥 먹으라는 소리는 부를 때 마다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합니다.
“성, 밥 먹어.”
“알았어.”
노는데 정신 팔린 형이 꿈쩍을 하지 않으면 동생의 말투는 점점 짜증스러워지고 나중에는 협박조로 바뀝니다.
“밥 먹으라구.”
“알었어, 임마.”
“얼른 밥 먹으러 오라니께.”
“하 새끼, 알았다니께 들구 그러네.”
“엄니한티 뒤지게 혼나두 모른다. 잉. 나는 분명 밥먹으라구 했으니께.”
지금은 동네 어느 구석에도 노는데 정신 팔린 형들이 없습니다. 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소리쳐 부를 아이들도 없습니다. 혹여 아버지를 불러야 할 일이 있으면 핸드폰이 있기 때문에 소리칠 필요도 없습니다. 목마르다고 물 가져오라 소리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부르는 정겨운 목소리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거의 매일 저녁 밭고랑 사이로 그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정겨운 소리들을 되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록 어린 내가 귀찮아하면서 불렀던 ‘아부지 진지 드세유’였지만 그 정겨운 목소리를 아이들에게 되 물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나처럼 다 커서 되돌아보면 가슴 아리게 메아리쳐 들려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 역시 저녁밥상은 우리식구들이 직접 일군 밭에서 나온 먹을거리들로 풍성 하게 차려졌습니다. 며칠 전에 캔 감자조림, 싱싱한 상추, 케일, 오이 직접 담근 된장 아직은 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반찬들이 밥상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집 아이들은 저녁 밥상을 물리자마자 학교에서 한창 신나게 배우고 있는 소금과 피리를 불어댑니다. 음악에 소질을 보이는 큰 아이 인효 녀석은 소금을, 인상이 녀석은 피리. 두 녀석이 ‘산도깨비’를 빽빽 합창하는데 그런대로 들어 줄만 합니다. 가만히 귀 기우려보면 집 옆으로 흐르는 개울 물소리, 집 뒤의 대숲에서 부는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들이 합주를 합니다.
우리 부부는 녀석들의 서툰 연주를 희희낙락 지켜보며 갈채를 보냅니다. 그렇게 집 주변에 까맣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천지, 다 낡은 형광등 조명 아래 우리 식구만 오롯이 남게 되고 녀석들의 기분 좋은 연주 소리가 세상 밖으로 멀리 멀리 퍼져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