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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부터 시아버지의 끔찍한 며느리 사랑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시댁에 갔을 때. 행여나 잔기침 한번이라도 하게 되면 시아버지께선 한밤중이라도 병원으로 달려가셔서 주사를 맞힙니다. 그리곤 제게 불호령을 내리십니다.
"에미가 되서 애가 저렇게 기침을 하는데도 그냥 놔두었냐. 기침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냐. 자고로 병은 초기에 잡아야 하는 거야. 애 주사 맞히고 약 먹였으니 이제 괜찮을 거다."
시아버님의 노발대발에 한마디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벌써 전화기 너머에선 뚜-뚜 하는 신호음만 메아리칩니다.
저는 대수롭지 않은 감기쯤은 주사나 약을 먹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이겨 내도록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열이 심하다거나 기침이 심해 침을 못 삼킬 정도로 목이 아프다면 당연히 병원에 데려가지만 약간의 미열이나 잔기침 몇 번 정도는 아이가 잘 때 머리맡에 물 적신 수건을 걸어 둔다든지 미지근한 물을 자주 먹인다든지 아니면 과일을 충분히 먹여 비타민 섭취를 시킨다든지 하는 방법들을 쓰곤 합니다.
그 모든 것의 발상은 잦은 주사나 약물남용이 면역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고 다행히 딸아이는 지금껏 굳이 주사나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감기쯤은 거뜬하게 이겨내고 있습니다.
또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돌아올 때면 아이의 손엔 평소 사달라고 조르던 것들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면 요란하게 벨소리가 울립니다. 어김없는 시아버님의 전화입니다.
"왜 돈 떨어졌냐? 그래서 애가 사달라는 거 안 사주냐. 비싼 것도 아니고. 친구들도 다 갖고 있다는데…."
"아버님. 그게 아니구요…."
그러나 제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이미 전화는 끊긴 지 오래라고 뚜-뚜라는 신호만을 보냅니다.
저는 아이가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면 평소에 잘 고쳐지지 않던 행동이나 잘 실천하지 않던 생활습관들과 상호교환을 합니다. 그 결과, 아이를 나무라지 않고도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맨 먼저 도시락을 꺼내 개수대에 담그는 일, 아이의 책상은 언제나 스스로 정리정돈 하는 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기 전에 꼭 일기를 쓰고 이를 닦는 일, 아침에 유치원 가방을 혼자 챙기고 제가 미리 챙겨놓은 옷을 혼자 입는 일….
그 모든 것들이 아이가 갖고 싶어 했던 캐릭터 인형이나 아바타 수첩, 투명한 모자들과 바꾼 것들입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생각은 저와 달랐습니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을 가지지 못하면 아이의 가슴에 욕구불만이 생길 수도 있고 또 다른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저만 가지지 못하면 기가 죽을 수도 있고 그리하여 모든 것에 자신감이 결여 될 수도 있다'
그게 바로 시아버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예전에 너무 어려워서 새끼들에게 그 흔한 장난감 하나 못 사주고 놀러 한번 못 데리고 갔다. 어린 마음에 친구들이 가지고 노는 그 장난감들이 얼마나 부러웠을 것이며 엄마 아빠 손잡고 놀러 가는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겠냐. 그나마 세상 천지에 친손녀라고는 저거 하난 데 뭣이건 이 할애비가 못해주겠냐."
결국 딸아이에 대한 시아버지의 사랑은 못다 준 자식사랑에 대한 아픔이었습니다. 그런 시아버지의 못 다한 자식사랑을 저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도 남습니다. 더불어 그 사랑을 하나밖에 없는 손녀에게 폭포수처럼 쏟아 부으시는 그 애끓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를 하고도 남습니다.
또 먼 옛날. 폐렴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었기에 아이의 잔기침 한번에도 덜컥 내려앉는 시아버지의 애끓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시아버지 가슴에 새겨져 있는 시퍼런 멍 자국이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아버지께 저의 생각은 감히 이러이러하다고 말씀 드릴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말씀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딸아이는 할아버지가 도깨비 방망이 같다고 합니다. '수리 수리 마수리' 주문을 외우며 힘껏 두드리기만 하면 원했던 그 모든 것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그 도깨비 방망이 말입니다. 어쩌면 7살 철부지의 눈높이에서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나절. 시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복희는 유치원 갔냐? 어디 아픈 데는 없냐? 이번에 내가 노란 가방 사준 거. 그거 갖고 애 나무라지 마라. 그냥 복희가 아무 말 안했는데 내가 사주고 싶어서 사줬다. 끊는다."
지난 26일(일요일).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다녀온 딸아이의 손엔 여름날 해바라기를 닮은 노란 가방이 들려 있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는데 갑자기 시아버지의 꾸부정한 어깨가, 쓸쓸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눈물이 앞을 가려버린 뿌연 시선 속에서 시아버님은 여느 때처럼 환하게 웃고 계셨고, 그 웃음 끝자락을 잡고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깊고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와 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순간. 늘 딸아이를 향하고 있을 시아버님의 그 마음이 해바라기와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덧붙이는 글 | 아버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복희 시집 가는 것 꼭 보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