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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의 추억을 새록새록 새기다 보니, 영화라는 매체가 생겨나고서부터 인간의 삶은 이것과 꽤 깊은 연관성을 맺고 지속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사랑을 만들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마음을 정화시키기도 하며 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어떠한 초강력 새 문화매체가 등장한다 해도 영화 산업은 계속 존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초보 연인'들에게 있어 영화관은 그들만의 사랑을 싹 틔울 수 있는 너무나 유효 적절한 공간이다. 영화관에서 손 한 번 잡아 보지 않고 커플이 된 사람들이 있을까? 초보 연인들이 자기들만의 데이트 장소로 영화관을 선호하는 이유도 아마 이 '은밀한 스킨십'이 공공연히 허용되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평을 가끔 쓰다 보니 영화 홍보사 측에서 시사회에 오라는 이메일이 종종 오곤 한다. 혼자서 찾는 영화관은 영화의 내용이나 구성, 인물과 촬영 기법 등에 집중할 수가 있어 참 좋다. 쑥스러워서 다른 때에는 혼자 가지 못하지만 기자 시사회의 경우, 나만의 영화 감상을 실컷 즐길 수가 있어서 스스럼 없이 혼자 가곤 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보는 영화는 다른 사람들이 즐기지 못하는 여유를 만끽한다는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재미와 매력이 존재한다. 특히 그 상대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이성일 경우, 그 짜릿짜릿함은 더 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온갖 이성적 판단에서 벗어나 평범한 여자의 마음이 되어 영화보다 옆에 앉은 남자의 마음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영화관 사랑은 그 공간이 '말랑말랑한 연애의 감정'을 생성하는 곳이기 때문에 생겨났을 수도 있다. 영화관을 함께 가고 밥을 같이 먹은 뒤 나란히 길을 걷다 보면 그저 그렇게 생각되던 상대방이 진짜 연인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초보 연인들'이 극장에 가서 '진짜 연인'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연애 감정, 극장 앞에서
1994년 대학 신입생 시절, 나에게 첫 번째 연애 감정이 생긴 것도 바로 영화관이다. 그때 본 영화가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아마도 처음 막 누군가를 만날 때 느껴지는 떨리는 감정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심각하게 조용히 앉아 영화를 보긴 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무슨 영화였는지 전혀 기억나질 않고, 그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가 입었던 겨울 코트의 디자인과 색깔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도 우습다.
대학에 갓 입학하고 알게 된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영화관을 간 날이었으니 내 역사책에서 지워질 수 없는 날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누군가를 사귀게 되면 영화관을 가는 게 당연한 절차로 여겨지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꽤 순진했던 내가 '남자'랑 영화관을 간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까.
하여간 그날, 추운 바람을 헤치며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영화관 밖으로 난 길을 걸었다. 아마도 따뜻한 차나 음식을 먹으러 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라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며 쑥스럽게 영화관을 나서는데 그 친구 또한 꽤 어색했나 보다. 한참 동안 별말이 없이 그냥 무작정 싸늘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추워서 몸을 좀 움츠린 채 종종 걸음으로 그 친구의 옆을 어색하게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추워? 추우면 이렇게 손 잡고 가면 따뜻하잖아!"라는 말과 함께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잡는다.
아, 그 순간 나는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는 걸 느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얼른 손을 빼지 못한 것은 그냥 그 자체로 너무나 따뜻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걸으면서 서로의 손에 땀이 삐질삐질 날 때까지 뭐가 그리 좋아서 방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영화관 안에서,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초보 연인들은 쉽게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렇게 어설픈 만남은 참으로 어설프게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어설픈 만남이 성숙된 만남으로 발전되는 적극적인 케이스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 친구와의 인연은 그저 그렇게 끝났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그 친구는 군대를 가고 나는 학교를 다니다 보니 흐지부지 어설픈 인연은 정리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그 당시를 떠올려 보면 우습기만 하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철부지 어린애들이 다 자란 어른인 척 영화 한 편 본다고 분위기 잡던 시절. 지금이야 많은 청소년들이 '영화'라는 매체에 쉽게 다가설 수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성친구와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빨간 신호가 아닌가. 그래서 영화관은 달콤한 스킨십이 공공연히 허용되는 공간이지 않은가 싶다.
마지막 연애 감정, 극장 안에서
영화관에서 마지막 연애 감정을 느껴 본 게 언제인가? 기혼자들에게는 아마도 결혼한 상대와 함께 갔던 영화관이 바로 '마지막 연애 감정을 느낀 극장'이 아닐까 싶다. 사랑을 전하는 공간으로서의 영화관은 모든 연인에게 있어 톡톡히 그 값어치를 한다. 만약 그 공간을 통해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영화비로 투자하는 몇 만 원쯤이야 전혀 아깝지가 않다.
나에게 있어 마지막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도 바로 영화관이다. 2004년 초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나를 발견한 현재의 남편은 두 번째 데이트 장소를 정동에 있는 한 영화관으로 정했다. 정동 길은 연인들에게 참 좋은 곳이다. 예쁜 돌담길이 놓인 산책로에 미술관, 공휴일이면 특히 한적해지는 영화관까지 주말 데이트 장소로는 너무나 훌륭하다.
내가 연애하는 동안 항상 '미련 곰탱이'라고 놀렸던 우리 남편도 이 당시에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가며' 좋은 데이트 장소를 물색했나 보다. 처음 만난 날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정동에 새로 생긴 영화관에 예매한 영화는 바로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모나리자 스마일>.
물론 나에게 미리 전화를 해서 어떤 영화가 보고 싶냐고 물어보고 결정한 것이기에, 나는 좋은 영화 한 편 공짜로 본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아 전화를 했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늦는 건 괜찮은데 늦는 대신에 내가 해달라는 거 하나는 해 줘야 돼요"라고 말한다.
도대체 뭘 해달라고 말할 건지, 이 곰탱이가 무슨 응큼한 생각을 하나, 아님 오늘 밥값 내라는 건가 등등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여간 꼭 해줘야 된다고 자꾸 강조하길래 알았다고 대충 대답하고서 목적지로 향했다. 괜히 늦게 나와서 엉뚱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고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만나던 사람인데 너무 심각하게 나오는 게 아닌가 거부감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상대가 무언가를 해달라고 하면 부담스럽지 않은가. 약간의 부담감과 어색함을 갖고 만난 그는 햇빛 아래서 좋아라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내가 2분밖에 안 늦었다고 강조를 하자 그래도 자기가 말한 것은 꼭 해주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싶길래?
영화관에 들어서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아까 뭐 해달라는 거 있잖아요, 그거 손잡는 건데 잡아 줄 거죠?"라며 덥썩 손을 잡는 게 아닌가. 이 귀여운 멘트에 손을 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새침떼기인 내가 같이 맞잡고 좋아라 할 수도 없고…. '하여간 남자들은 엉큼하다니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영화 보는 내내 손을 잡고 놓칠 않는 이 사람의 모습을 보니, '이 남자가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영화를 보러 다니고 산책로를 걷고 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고, 지난해 12월에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난 후 손잡고 영화를 보러 간 적은 없지만 앞으로 영원히 그럴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지금도 남편을 보면 '곰돌이 한 마리'랑 같이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마 처음 연애할 때의 그 감정이 항상 내 마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인가 보다. 손 한 번 잡아 보려고 혼자서 머리 굴리다가 늦는다길래 얼씨구나 하고 엉뚱한 제안을 하는 순진한 모습. 그 모습에 반해서 지금 이렇게 부부가 되어 살고 있다.
결혼하고서 남편이 하는 말이 "아, 그때 내가 꼬시려고 얼마나 머리 썼는데… 영화관에서 손 한 번 잡아 볼려고… 늦는다니까 '이게 기회다' 싶더라"고 한다. 자기는 그때 무슨 영화를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단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마이뉴스>에 영화평도 올렸는데…. 이 글을 통해 얘기해 줘야겠다.
"서방님, 그때 내 손 붙잡고 있느라고 진땀 흘렸어? 그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이야. 내가 쓴 영화평도 <오마이뉴스>에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까 한 번 꼭 봐. 그리고 아기 낳으면 다시 손 꼭 잡고 영화 보러 가자. 사랑해!"
영화관에서 사람들은 추억을 만든다. 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찰칵찰칵 지나가는 화면을 보며 사랑을 느끼고 세상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래서 어떠한 문화 산업이 새롭게 태어나고 또 성장하더라도, 영화관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초보 연인들은 왜 극장에 갈까?'의 마지막 이야기로 <극장전> 공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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