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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가 삶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밀가루에 약간의 물을 넣고 숟가락으로 고슬고슬하게 밀가루와 물을 섞어 놓으셨다.
한참이 지나자 감자 익은 냄새가 구수하다. 어머니는 익은 감자위에 고슬고슬한 밀가루를 얹고 뜸을 들이셨다.
잠시 후. 어머니께서 냄비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오늘 감자범벅도 성공이라는 것을.
감자위에 얹혀진 익은 밀가루는 도대체 빵인지 떡인지 구분이 안 간다. 아무리 봐도 떡에 가깝다. 어머니는 감자와 익은 밀가루 떡을 아래에서 위로 여러 번 뒤집으며 주걱으로 잘 섞으셨다.
감자의 보송보송한 분이 아주 감칠맛 날 것 같았다. 그냥 감자만 먹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에 들린 주걱은 가차 없이 감자를 으깨고 있었고, 밀가루 떡과 무지막지하게 섞어 버렸다.
옛날, 어머니께서 한 그릇 담아 주신 감자범벅을 난 늘 분이 보송보송한 감자만을 골라 먹다 혼이 나곤 했다. 결국 골라내놓은 밀가루 떡은 언제나 어머니 차지였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그걸로 허기를 채우신 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해마다 햇감자가 지천인 이때쯤 늘 감자범벅을 하셨다. 질리지도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빙그레 웃으셨다. 어머니의 그 웃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추억을 즐기시는 건 아닌 듯싶다. 추억이라고 하기엔, 또 새삼 들추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슴 아픈 추억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그 옛날 그때처럼 한 끼 허기를 채우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건만.
갖은 양념으로 잘 무친 파김치와 새우젓으로 간을 한 콩나물국, 구수한 냄새가 일품인 감자범벅이 점심상으로 차려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참 맛있게 잡수신다. 그런 두 분을 나는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해마다 이 감자범벅을 보면 나는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이걸 먹는 건 아니니까. 사람은 어려웠던 때를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야. 어려웠던 그때를 생각해보면 지금을 감사하고 행복하게 받아 들일수가 있는 거거든. 모든 게 지천으로 넘쳐난다 해도 아직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삼 시 세끼 밥걱정 안하고 사는 것도 큰 복이라고 생각해야해. 엄마는 이 감자범벅을 이젠 별미로 먹는다. 봐라. 옛날엔 배가 고파 먹던 것을 이젠 별미로 먹으니 이만하면 이 엄마도 행복한거 맞지?"
굳이 어머니의 긴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맛있었다. 한 그릇의 감자범벅을 다 먹었다. 밀가루 떡까지도.
포만감과 행복감에 또 지금 내 현실에 대한 만족감에 그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비 내리는 오후 한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