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도야 이해가 가지만 몇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어 보인다.
먼저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을 향한 시선이다. 우선 문구를 보자.
'자살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선택을 결정한 사람에게 너무나 삭막하고 냉담한 문구가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압적으로 질책을 하고 비난하고 있는 문구다. 자살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는 투는 당신은 모르는데 나는 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냉담한 반응이 더 자살을 부추기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살하기 보다는 해결방안이 없기 때문에 포기한 상태에서 자살에 임한다.
둘째, 디자인이다. 마치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금연 문구를 연상 시킨다. 더구나 자살은 단지 담배를 피고 안 피고의 간단한 기호품과 같은 문제는 아닐 것이다. 70~80년대의 무지몽매를 타파하려는 듯한 계몽 포스터 느낌이다.
세번째, 단어 선택의 문제이다. 자살을 강조하기보다는 생명이나 희망을 강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또한 딱딱한 단어보다는 감성적인 문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도록 할 수는 없을까? 그렇지 않으면 슬로건이나 포스터 자체가 절망적이고 우울할 수 있다.
네번째, 국민적인 참여, 제안을 위해 공모를 통해서 많은 아이디어와 내용를 모을 수는 없을까? 더구나 국민들의 디자인이나 색채 감각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세월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자살을 너무 개인의 원인이나 결심의 문제로만 몰아가고 있는 인상이다. 정신병적 장애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가 자살에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외부적인 요소가 심리에 영향을 미치며 일어난다. 설령 정신분석학에서 같이 자기파괴 욕구가 자아가 약해지면서 나타나고 이것이 자살로 이어진다고 해도 자아가 약해지는 것은 외부의 영향 요소 때문이다.
실업, 실연, 이혼, 사별, 사업 실패- 부채, 재해, 불치병, 희망의 상실에 자살은 증가한다. 도시화와 사회의 결속 상실, 가족의 역할과 성역할의 변화도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많다.
뒤르켐은 정치적 위기와 사회적 규범이 느슨해지면 자살이 증가한다고 했다. 개인들이 사회와 절연되어 고립에 빠지기 때문에 이기적인 자살이 나타난다고도 했다.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사회가 개인에게 당연히 제공해야 할 생활 요건의 미비를 비판한다. 그렇다고 외부 원인에만 전가되는 것은 아니다. 토머스 브로니쉬는 자살기도 및 자살을 실행하게 만드는 삶의 조건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한다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국가사업이 되어야 할 텐데 이번 자살 방지 홍보사업은 개개인들을 향한 일회성 캠페인에 머무는 인상이다. 자살에는 철학적 자유권적인 많은 의미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부정적이라는 데 모아진다. 몽테뉴는 죽는 것보다는 괴로움을 참는 것이 낫다고 했고 칸트는 자살은 비열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안이한 방법에는 틀림없다고 했다. 또한 엘자 트리오레는 자살은 없고 살인만 있을 뿐이라며 자살에 대한 강한 부정인 생각를 나타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살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거꾸로 살아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에 고통과 상처를 주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루소는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일단 이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이상은 무엇인가 해야할 일을 찾아야만 한다. 인간은 누군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인류에게 유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