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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 심을 밭을 갈고 있는데 동네 입구 노인회관 공터에 차를 세우는 사람이 보였다. 두리번거리는 품새가 나를 찾아오기로 한 손님 같았지만 모른 척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저어. 길 좀 묻겠는데요."
부러 뒤돌아 선 채 일을 하고 있는 내 등 뒤에서 그가 어물쩍거리며 길을 물었다.
"모든 길은 결국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 아니겠소!"
나는 밀짚모자 눌러 쓴 머리를 더 숙이며 목소리를 꾸며 동문서답을 했다.
"네? 아 네에… 여기 전희식씨네 집 가는 길이 어느 쪽인가요?"
"사람을 찾소? 집을 찾소?"
"네. 사람 좀 만나려고요."
"거 참. 앞에다 두고서 사람을 찾는다니 멍청한 사람이로고!"하며 돌아섰더니 감쪽같이 속은 이 친구가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법석을 떨었다.
'풀밀어'라는 수동식 풀매는 기계를 보러 멀리서 온 친구다. 콩을 심었는데 자연농법이니 태평농법이니 하는 말들만 듣고 제초제를 안치다보니 점점 풀을 감당하기 힘들어져서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상태가 좋을 경우 이 '풀밀어'는 한 시간이면 콩밭 400여 평을 너끈히 맨다. 덴마크에 선진농업 견학을 갔던 '정농회'의 선배 한분이 이걸 발견하고는 스케치를 해 와서 보급하고 있는 농기구다. '풀밀어'는 이랑 사이를 매고 '딸깍이'라는 농기구는 포기 사이를 매는 기계다.
'풀밀어'를 가지고 실습을 하고 난 이 친구가 디카를 들고 우리 밭을 샅샅이 이잡듯이 돌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고추밭에 들어서면서 이친구가 한 첫마디가 걸작이었다.
"우와~ 니네 고추는 엄청 씩씩하구나."
사람 고추건 밭 고추건 씩씩한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마는 '씩씩한 고추'는 우리 집 고추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고추 심은 지 달포나 되지만 고춧대에 묶지 않은 우리 고추는 혼자 힘으로 비바람을 버티어 오느라 운동선수의 쫙 벌어진 어깨처럼 생겼다.
키는 작은 대신 줄기가 굵고 잎이 아주 무성하다. 이 과정에서 뿌리는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간다.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벌어지는 땅 틈새로 뿌리를 더 내리는 것이다. 이제 고춧대에 묶어주면 빠른 속도로 키도 자라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고춧대에 묶이고 밭은 온통 까만 비닐로 뒤덮인 채 독한 제초제로 풀 한 포기 못자라는 불모의 땅에 서 있는 고추들만 봐 오다가 온갖 잡초와 베어 깐 풀들로 수북한 우리 고추밭을 보고는 이 친구가 강렬한 생동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완전 백화점이구만. 고추밭에 웬 불청객이 이리도 많어?"
고추밭 한 가운데로 들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이 친구가 두 번째로 한 말이다. 내가 풀을 매다가 발견하고는 그 모진 겨울을 어떻게 견디어내고 이렇게 싹을 틔웠나 싶어 놀라움과 소중함으로 감히 뽑아 낼 엄두를 못 내고 커 나가게 두었더니 꽤 자란 오이 셋, 조선호박 두 포기, 들깨 모 여남은 개, 흰 감자 네 포기, 자주감자 두 포기. 여기다가 고무줄보다 목숨이 질긴 쇠비름. 잎사귀만 작으면 고춧잎 같이 생긴 명아주 등이 섞여 있는 우리 고추밭은 정말 백화점이다. 땅 위만 그런 게 아니고 땅 밑에는 더할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선문답을 했다.
"더불어서 함께 살아야 저렇게 씩씩해지는 법이여. 저 혼자만 잘 살려고 하면 도리어 곯아."
덧붙이는 글 | <농어민신문> 6월 첫주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