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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은 중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그 때. 제 눈에 뭔가가 들어왔습니다. 탁자 위에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책갈피를 비집고 뭔가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도 그건 천 원짜리의 한 귀퉁이었습니다. 부리나케 책을 넘겨 천 원짜리가 꽁꽁 숨어 있는 그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순간 전신을 드러낸 그 천 원짜리가 어찌나 반가운지. 하지만 반가움을 표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냅다 달렸습니다. 달리면서 휴대전화 시간을 보니 정확히 2시 35분이었습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마을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2시 40분. 저만큼 버스가 오고 있었습니다.
손에 꼭 쥔 천 원짜리를 자랑스럽게 요금 통에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기사 아저씨를 향해 환하게 웃었습니다.
"아줌마! 왜 웃어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저씨! 만약에 오늘 제가 만 원짜리를 요금으로 냈으면 아저씨는 어떻게 하셨을 것 같아요?"
"어쩌긴 뭘 어째요. 다음에 받으면 되지."
"뭘 믿고 다음에 받아요?"
"뭘 믿긴요. 일주일에 두어 번은 이 버스 타시면서. 그리고 제가 관상을 좀 보는데 아줌만 버스비 못 떼먹을 상이거든요."
아저씨의 그 우스갯소리에 기사 아저씨도, 몇 안 되는 손님 몇 분도, 또 저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 웃음소리는 바로 넉넉한 시골인심이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마을버스 기사아저씨도 어느새 저의 넉넉한 이웃이 되어 있었다는 아주 기분 좋은 확인이었습니다.
치과에 도착해 진료를 받는 내내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갈피에 있던 그 천원의 정체에 대하여. 그런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성격인지라 조급증에 안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줌마! 입 좀 더 크게 벌려 보시라니까요. 오늘 아줌마 이상하네. 왜 빨래 걷는 걸 잊고 오셨어요?"
의사 선생님의 입 좀 더 크게 벌려보라는 소리도 못 듣고 있을 만큼 저는 그 천원에 대한 궁금증에 한없이 침몰해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의 그 말씀에 뭔가 '번쩍'하고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세탁기였습니다.
얼마 전 세탁기를 다 돌리고 빨래를 널다 물에 흠뻑 젖은 천 원짜리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세탁 전 남편의 주머니를 살폈어야 했는데 깜빡 잊고 그냥 세탁기를 돌려 버린 것이 아마도 천 원짜리 지폐도 함께 세탁을 해버린 이유인 듯싶었습니다.
흠뻑 젖은 그 천 원짜리를 말리려고 무심히 탁자에 놓인 책갈피에 끼워 놓았던 게 그때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결국 잊고 있던 그 천원이 어제서야 깜짝 보너스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마흔을 겨우 넘겼을 뿐인데 벌써 건망증이란 사슬에 그렇게 차츰 묶여 가고 있는 저 자신이 괜히 씁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농협에 들러 2만원을 천 원짜리 스무 장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장에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책갈피마다 끼워 놓았습니다.
유비무환이라고, 혹시 또 어제 같은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비기도 하거니와 어제처럼 무심히 잊고 있던 그 천 원짜리가 어느 날 또 이렇게 깜짝 보너스가 되어 줄 것이란 묘한 기대심리가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지루한 일상 정말 별거 아닌 그 일이 어제 오후 내내 제 기분을 참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