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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녀지간이라는 이 토끼들은 갑자기 낯설어진 환경에 겁을 집어먹은 듯 동윤이의 부드러운 손길조차도 자꾸 피하려고 했다. 이러한 낯가림은 어리긴 해도 몸집은 어미와 거의 비슷한 어린 딸의 경우에 더 심했다. 어미와는 달리 코 부근에 하얀 털이 돋아나 있는 그 어린 토끼를 우리는 '백코'라고 부르기로 했다.
자꾸 들여다보면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딸아이가 먹이 줄 때마다 함께 나가 우리는 토끼들과, 특히 '백코'와 눈을 맞추었다. 이삼일 지나자 조금 나아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매일 한밤중에 한두 번씩 우당탕거리며 요란을 떠는 걸 보면 여전히 아직도 우리 집이 낯선 모양이었다.
토끼장을 둔 곳이 좁은 처마 밑이라 비가 들이쳐서 그러나 싶어 큰 비닐을 토끼장 위에 덮어주어 비가림을 해주었다. 한밤중에 유령처럼 나타난 도둑고양이를 보고 놀라서 그러나 싶어 센서로 자동 점멸되는 안뜰의 보안등도 켜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밤중에 한두 번씩은 요란스럽게 쿵쾅거리며 토끼장의 나무판을 치받는 소리가 들렸다. 잠귀 밝은 아내는 그 소리에 깨어나, 우리가 괜한 고생 사서 한다면서 잠꼬대처럼 내게 푸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 토끼장 안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판들이 갈려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집히는 것이 있었다.
'그래, 너희들도 자유가 그리웠던 모양이구나. 비좁은 토끼장에 하루종일 아니 벌써 일주일째 갇혀서 지내는 것이 너무나 지겨웠던 모양이구나.'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고 바람도 심하게 부는 이곳의 겨울 날씨는 좀처럼 해를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아서 우리 집의 가여운 토끼들은 좀처럼 철망 바깥 세상 구경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 온 지 열흘째가 되는 오늘, 드디어 해가 쨍쨍하게 나왔다.
나는 점심을 먹은 후 토끼장 문을 열어주어, 우리 집 안뜰에 놈들을 풀어놓았다. 모처럼만에 맛보는 자유가 너무나 좋은지 토끼들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법석이었다. 귀 쫑긋 세우고 잠시 얌전히 풀을 뜯어먹다가도 갑자기 누리게 된 이 자유가 너무나 좋은지 발레 하듯 뒷발을 허공 중에 쭉 뻗다가 쏜살같이 내달리곤 했다.
풀숲으로 번갈아 숨어들면서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두 모녀가 함께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 딸아이 동윤이와 아내, 그리고 마침 우리 집에 놀러온 딸아이의 남자친구 사이몬과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풀어놓은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다시 토끼장 안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 집 안뜰은 사방으로 울타리가 쳐 있으니 도망갈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토끼장 안으로 옮겨놓아야 안심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풀어놓은 토끼를 붙잡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하고 겁도 덜한 어미 토끼는 쉽게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어미 토끼에게 다가서서 가만히 서 있다가 재빠르게 토끼의 등을 두 손으로 낚아채서 단 한 번 시도로 붙잡을 수 있었다.
붙잡힌 어미 토끼는 뒤늦게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비틀며 내 손등을 할퀴기도 했지만 나는 무사히 토끼장 안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문제는 겁 많고 훨씬 더 재빠른 어린 토끼, 즉 '백코'를 붙잡는 일이었다.
어미 토끼를 잡은 방식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이십여 분 동안 '백코'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나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약이 바짝 오른 나는 덮쳐서 잡을 요량으로 플라스틱 양동이를 가져왔다. 내가 양동이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니 '백코'는 더욱 놀라서 풀숲 깊숙이 들어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이몬이 나섰다. '백코'가 숨어 있는 풀숲으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등거죽을 움켜쥐어 토끼를 끄집어냈다. 드디어 잡혔구나! 나는 얼른 양동이를 들이대어 발버둥치는 '백코'를 그 안에 받아서, 마침내 토끼장 안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너무나 어렵게 토끼를 붙잡아 넣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는, 토끼 함부로 내놓을 일이 아니라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토끼장의 철망 너머에서 원망스러운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토끼들의 눈동자를 보며 약속했다.
그래, 걱정 마라. 볕 좋은 날이면 내가 어김없이 우리 집 안뜰에 너희들을 풀어놓으마. 지겨워질 때까지 실컷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할 테니 다시 토끼장 철망 안에 갇히게 된 이 순간을 슬퍼하지 말아라.
내 약속을 알아들었는지 '백코'의 하얀 코가 아래위로 움찔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백코'야, 다음 번에 내가 풀어주었다가 다시 붙잡을 때는 나 애먹이지 않을 거지, 그렇지? '백코'는 이번에는 귀 쫑긋거리며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