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길을 오르는 것이 힘에 부치는 것도 아닌데 자꾸 걸음이 느려진다. 초록빛 새 옷을 갈아입은 나무와 풀에 눈을 빼앗기느라 어느새 뒤쫓아온 우정이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 딴에는 장난이라도 칠 양으로 살금살금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붉은 염색 머리 우정이, 어제 영어 시간에 우정이는 유창한 영어로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에 대한 발표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래서인지 오늘 그의 표정에선 여유가 넘친다. 어제의 긴장하던 모습이 떠올라 싱긋 웃음을 짓는다.
잠깐 우정이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고2 영교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발길을 재촉한다. 약간 파마 기운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 살짝 드러나는 입매가 당차 보인다. 영교가 활동하는 인권동아리 '아우름'에서 기획하고 진행한 '인권주간' 행사도 막을 내려 이제 좀 한가할 텐데 또 뭔가 다른 일이 영교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언덕 위 학교 마당, '작은 느티'에서 낯익은 '아우름' 아이들 몇몇이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언뜻 'NO CUT'이라는 영어가 눈에 박힌다. 아, 두발 단속….
생각이 과거로 달린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 몇 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다. 지난해 이맘때 필자는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부 교사였다.
지난해 아침은 오늘처럼 여유롭지 않았다. 아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어야 정상인 아침 등교 길, 선도부 학생들을 교문 양 옆에 세우고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들한테서 뭔가 꼬투리를 잡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절로 주눅이 든 아이들은 공연히 눈치를 살피며 교문을 통과하고 명찰이 없어서, 머리가 길어서 또는 학교가 정해 놓은 등교 시각에 늦어서 몇몇의 아이들은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정해진 교복,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한 아이들이 일렬로 맞추어진 책상에 앉아 똑같은 표정으로 몇 시간째 교사의 지식을 전수받고 있는 교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특명을 받은 학생부 교사들이 점령군처럼 나타나 교단을 접수하고 아이들의 머리 길이를 측량했다. 여러 아이가 복도로 끌려가 그 중에 몇몇은 엉덩이를 맞고 나머지 몇몇은 언제까지 머리를 '단정히' 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나서야 두발 단속에서 풀려나곤 했다. 물론 약속의 이행 여부는 철저히 확인되었다.
체육 시간에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나간 교실에서 담임교사가 학생의 가방을 뒤지는 일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아이들의 비행을 예방(?)하기 위한 미덕으로 여겨졌고, 수업 시간을 할애하여 아이들의 머리를 보기 좋게(?) 깎는 교사는 생활지도에 최선을 다하는 우수 교사로, 이러한 행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부 돈키호테 같은, 인기에 영합하는 교사들이 보고 배워야 하는 모범으로 추천되었다.
'학업에 지장이 있다' '비행의 소지가 있다' 근거는 명쾌했다. 하지만 학생에 대한 통제의 끈을 놓아 본 경험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 근거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했다. 단지 학생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을 뿐이었다.
비단 필자의 경험만 그러할까? 많은 학교에서 '교육'은 자주 '훈육'과 혼용되고, 학생은 교육의 주체이기는커녕 미성숙한 인격으로 치부되어 통제와 규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통제와 규제는 필연적으로 획일성을 낳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획일성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두고 있다. 집단의 규율과 질서가 개인의 존엄과 가치에 우선하여 개인의 바람직한 인성 형성을 가로막고 규율과 이를 통한 통제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자기 주도적 능동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필자도 변명의 여지없이 이러한 불합리의 방관자였다.
불과 몇 달 전 기억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부끄러운 기억을 빨리 잊고자 하는 심리 작용일까? 이우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지난 시절 나의 '방관'이 '동조'의 다른 이름이란 것을 깨닫는다. 이우학교에선 아이보다 교사가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한다.
때론 머리 모양과 색깔로, 때론 마치 어른처럼 보이는 화장과 장식으로 자기가 가진 색깔을 마음껏 드러내는 아이들, 이런 외모에서 풍기는 자유가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 바람직한 인성과 자기 주도적 능동성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또는 기여하고 있는지 쉽게 속단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규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학업'과 '비행'의 개념에서(사실은 이 단어의 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 이우학교 학생들을 바라보더라도 그들의 근거는 설자리를 잃는다. 빨간 머리, 노란 머리, 화장한 아이, 귀고리 한 아이, 파마한 아이들이 넘치는 학교이지만 학교 폭력이 발생한 경우는 물리적, 정신적 경우를 포함해서 개교 이래 3년 동안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흡연 학생의 비율은 1%도 채 되지 않는다. 또한 아이들의 학습에 대한 동기화, 목적의식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하는 열의는 그들의 외모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이 목격되고 있다.
아이들의 두발과 복장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논쟁은, 결국 아이들을 오직 '입시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인가 아니면 아이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씨앗을 키워 스스로 자신의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하고 삶에 대해 능동적으로 접근하도록 방향을 설정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인가에 대한 거시적 논쟁의 일부분일 것이다. 거시적 논쟁에서 얻어진 답은 분명하고 모두 합의한 것처럼 보이는데 왜 미시적 부분에서는 익숙한 방식과 수단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지, 이우학교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세상은 헛헛한 답답증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그 답답증이 나를 이우학교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우름'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마치 함성처럼 들린다.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는 그 모순으로 인해 피해 입고 소외되는 당사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문제가 단지 학생만의 문제일까? 그저 학생만의 문제, 너희만의 문제로 내버려 두고 방관하는 것이 책임 있는 교사와 어른의 몫일까? 답이 분명한 문제를 되뇌는 동안 어느새 학교 언덕은 등교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발걸음 소리로 가득해졌다.
★이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7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