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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나니 바빠졌다. 장맛비 속에서 속만 끓이다가 이제 기회가 온 것이다. 탄저병 제로를 향한 대장정의 출발이다.
담 너머로 옆집을 넘겨다봤다. 할아버지가 날씨도 더운데 좀 쉬지는 않고 마당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담장을 휙 넘어서 갔더니 뭐라 한마디 하려고 입을 오물오물 하시는데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할아버지 분무기 좀 주세요."
"뭐? 분… 뭐?"
"약 통요. 농약 통요."
담장 넘어 다닌다고 한소리하려던 할아버지는 그건 벌써 까먹고 농약 통 달라는 내 말을 반신반의 하느라 눈을 더 크게 뜨시더니 금세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어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농약을 쳐? 히시기 타락했네? 어때? 농약 안치고 농사 못 짓겠지 응?"
농약이 아니고 우리 고추들 먹이려고 내가 보약 좀 달였다고 했더니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싶은지 "보약? 농약 아니고? 한의원에서 지었어? 그 노무 고추에 보약 달여 멕여 가지고 수지맞겠다. 츳츳"하고는 뒷간 선반에서 농약 통을 꺼내 주신다.
아뿔싸~ 할아버지 분무기는 몇 번이나 씻어내도 지독한 농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분무기는 10년이 더 지난 알루미늄 옛날 분무기인데 지난달에 오줌을 담아 관주(작물의 뿌리에 분무기 대롱을 꽂아 액비를 주는 농사법)를 하고는 씻는 것을 잊고 그냥 뒀었나보다. 고무패킹이 다 녹아서 쓸 수가 없다.
이미 청초액비에다 한방영양제, 그리고 목초액까지 다 준비 해 놨지만 할아버지 분무기를 그냥 쓰자니 마음에 걸렸다. 급히 읍내로 차를 몰고 가서 새 분무기를 사 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신형 분무기는 가볍고 튼튼했다. 세 종류의 유기농자재를 각각 알맞은 비율로 물에 희석해 분무기에 넣었다.
올 해 고추 탄저병 제로가 내 목표다.
내 고추밭에 탄저병 고추를 단 한 포기도 들이지 않기 위해 나는 대대적인 작전계획(?)을 세웠고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유기농으로 유명한 조한규 선생의 가르침과 독일 슈타이너선생의 역동농법에 맞춰 작전을 세운 것인데 100% 자신하고 있다. 어제가 보름인 것을 오랜 전부터 달력에 적어 두었다가 약을 뿌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에 맞춰서 마늘과 생강, 그리고 소주로 만드는 한방영양제도 날수를 역산하여 만든 것이고 청초액비도 조한규 선생의 가르침을 응용하여 역산해가며 완성한 것이다.
조한규 선생은 생명력이 강한 쑥과 미나리를 추천했는데 나는 이들만큼 생명력이 강한 쇠비름과 들깨순, 은행잎, 그리고 토마토 순 자른 것도 함께 사용했다. 고구마순과 토마토 순이 마디가 땅에 닿기만 하면 살아나는 식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미나리는 개울에서 베어다 고추밭에 깔아줬었는데 이것들이 장맛비에 마디마다 뿌리가 생겨 다 살아 나 버린 것을 보고 감탄을 했었다.
액비는 잎을 통해 영양이 공급되는 것인데 보름날에는 생식생장을 하고 그믐에는 영양생장을 하므로 보름에 한방영양제를 액비에 섞어 뿌린 것이다. 보름에는 벌레들의 산란도 활발하다. 보름 전후 3일을 일몰 3시간 이내로 잡아 뿌려줘야 해충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이라고 두 분 선생들은 말하고 있다.
액비 재료를 채취 할 때는 동트기 전에 한다. 이때가 밤 내내 식물이 이화작용을 통해 영양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이다. 깨끗하게 이슬이 묻은 채로 항아리에 효소를 담그는 것이다. 분무기에 넣다가 목마르면 물에 타서 한 잔 마시면 아주 좋다. 목초액도 일하다가 손과 팔뚝에 난 작은 상처들과 풀독 오른 부위에 물에 타서 발라주면 깨끗이 낫는다. 사람이 직접 먹을 수 있는 것을 작물에 주는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분무기를 돌려줬다. 벌써 약을 다 쳤냐고 하기에 내 한약이 할아버지 통에 묻을까봐 통을 새로 샀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다음에 우리 약통을 빌리시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