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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묻어있는 아버지의 배
추억이 묻어있는 아버지의 배 ⓒ 주경심
돈을 번 선주들이 배와 마을을 버리고 육지로 하나둘 떠나면서 내 아버지를 향한 캐스팅 전쟁도 선주들이 버리고 간 그물처럼 물밑으로 소리없이 사라졌습니다. 바다밖에 모르시던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배를 하셨습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으스름 저녁에 바다로 나가 아침 태양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다른 선주들처럼 부자 돼서 섬을 뜨겠다는 생각같은 건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식들 공부시키고, 밥 먹이고, 사람 냄새나게 살고자 하는 것외에는 아무런 욕심도, 바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버지의 배는 번번이 손해만 남기고 교체되었습니다. 해상국립공원에 자리하는 그곳에서는 해먹고 살만한 모든 조업이 불법이었으니 아버지는 어느새 범법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범법자인 아버지의 배는 쫓아오는 경비정보다 더 빨라야 하고, 아버지보다 젊은 사람들의 패기를 따라잡아야 했기에 기계를 바꾸고, 배를 바꾸고, 그물을 바꾸다 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이름 석자 뒤에는 범법자라는 수식어 외에도 어마어마한 빚이 덩그러니 남아버렸습니다. 또 가고 싶은 곳도 얼른 일어나 가지 못하는 미련한 다리가 세월의 훈장처럼 남았습니다.

살림밖에 할 줄 모르던 엄마가 돈을 벌러 나섰습니다. 물젖은 장화를 신고 고기 담는 함지박을 두 세 개 포개고 어판장으로 내달리던 그 억척으로 모래를 여다 나르고 벽돌을 날랐습니다. 하루 종일 팔꿈치가 떨어져 나가도록 전복 바구니도 털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해질녘 엄마의 손 위엔 삼만 원도 안되는 돈이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다달이 빚은 불어가고 엄마의 벌이로는 두 양주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습니다.

걱정, 걱정. 떠올리는 밥의 절반은 한숨으로 채워 넣으셨습니다. 어느 날은 "이리 살아서 뭣하겄냐, 죽는 것이 낫지"하셨다가 또 어느 날은 "이래 사나 저래사나 한 인생인디 나가 살다가 살다가 죽고 나믄 그때는 빚이야 있든가 말든가 나도 모르겄다" 하셨습니다.

아버지 덕에 나고 자랐건만 그 빚 한 덩어리 떼어오지 못하는 딸로서는 자포자기하는 소리가 그래도 죽겠다는 소리보다는 듣기가 한결 나았습니다. 아버지의 죽겠다는 소리는 아버지의 숨통뿐 아니라 살기가 버거운 자식들의 숨통까지도 점점 조여오는 듯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에게 서광이 비친 걸까요? 아니면 아버지 말마따나 "인지 다 늙어서 이것이 뭔 복인가 모르겄다, 복인지 벌인지"하듯이 일복이 넝쿨째 들어온 걸까요? 마을에 배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고 사람을 구한다는 소문이 돌아 아버지의 인기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몇날 며칠을 "나 같은 늙은이를 누가 써 주겄냐?" 하셨던 것과는 달리 선주와의 협상자리에선 당당하게 큰소리도 치셨다고 하셨습니다.

"나가 시방은 이리 늙어 패물이 됐어도 왕년에는 선수를 십년이나 했던 사람이요. 긍께 나를 써서 손해는 안 날 것인께, 쓰든가 말든가는 선주가 결정을 허시오."

그리고 드디어 취직이 되신 겁니다. 젊은 사람들 다 제치고 환갑이 넘은 내 아버지가 힘들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 뱃사람으로 당당히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아버지의 취직에 왜 전 눈물이 나는 걸까요? 젊고, 많이 배운 사람도 하기 힘든 취직을 국민학교도 못 나온 환갑의 내 아버지가 하셨는데 왜 전 마음이 이토록 아린지 모르겠습니다.

선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아버지. 예전 같지 않게 하루 일에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는 아버지. 힘든 일은 노인이라고 못하게 하는데 그게 더 서럽다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혹시 젊은 사람들이 자식 없느냐고 물어오면 자식새끼들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시라 했습니다. 그런데 웃자고 던진 소리에 아버지도 저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힘들게 일하는 그 모습이 짠해서 아버지에게 "영감님, 자식은 없으세요?"하고 물어오면 내 아버지 "서울에서 젤로 잘 사는 딸이 있는디, 우리 딸은 내가 이런 일 허는 것 몰라. 나가 그냥 심심해서 취미로 하는 거여"하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내 아버지라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을 하실 겁니다.

"우리 딸은 모르는 일이여! 참말로 몰라."

그 마음을 알기에 더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아버지가 취직에 이어 드디어 승진까지 하셨습니다. 15년 만에 다시 선수가 되신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15년 만에 '선수딸'이 됐습니다.

취직이 되기 전 늙은 몸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짓던 아버지에게 "동네에서 인물도 젤로 좋고, 몸매도 젤로 좋은 사람이 우리 아부진데 우리 아부지를 안 뽑으면 누굴 뽑을 거냐"고 했던 딸의 바람을 아마 하늘이 들었나 봅니다.

물론 선수라는 그 감투가 어쩌면 아버지에게 한가지 고민을 더 안겨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수 아버지'라는 호칭 뒤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허허" 웃음소리가 듣기 좋기에 전 오늘도 아버지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띄웁니다.

"아부지! 아부지는 세상에서 인물도 젤로 좋고, 몸매도 젤로 좋은 선수예요!"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아버지에게 승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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