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에 빛나는 네온사인 간판을 폰카에 담고 있는데 내가 도착한 느낌이 들었는지 지하에서 유형재 배기모(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http://www.baehofan.com) 회장이 나와 반긴다.
그의 뒤를 따라 지하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벽에 장식된 배호 대형사진이 살아 있는 듯하다. 홀 안으로 들어서자 적당한 방송날짜 찍어주기로 방송가에서 유명한 역술인 추석민씨가 배호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지난해 주문진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강릉 배호 파도 가요제에서 <황토십리길>을 불러 배호상을 받았던 사람이다.
"공부시간에 배호 노래 가사 적다가 선생님한테 얻어맞았죠"
'아, 이곳은 안식처다! 속세에 지친 현대인에게 카타르시스를 베풀어주는 아늑한 배호 동굴 같은 곳.'
이것이 이 노래하는 작은공간을 바라본 내 첫 느낌이다. 마침 지난 달 30일 ‘배호 라이브 카페’에서 열린 배호모창대회에서 대상, 금상, 은상을 받았던 배호 마니아들이 와 있다. <향수>를 부르고 대상을 받은 황광흡씨는 기업은행에 재직 중이다. 배호 노래를 녹음한 CD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배호에 푹 빠져 있는 사람.
“1970년 전후해서 고등학생 때는 공부시간에 공책에 공부할 걸 적지 않고 배호 노래 가사를 적다가 선생님한테 얻어맞기도 했죠.”
어느 정도 배호 마니아였는지 당시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수업 시간에도 학과 공부 대신 배호 노래 공부를 하였던 셈 아닌가.
“제가 1972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해병대 갔습니다. 그래서 월남전 갔다 온 분들과 해병대 생활을 같이 하게 됐죠.”
“청룡부대 말이죠?”
“예.”
“군기가 꽤 셌겠습니다.”
해병대 군기는 요즘도 세다던데 그 시절엔 더 셌을 것이다.
“고참이 불러다 놓고 배호 노래 부르라는 겁니다. 안 불렀다간 얻어터지는 거죠. 그래서 <울고 싶어>를 부르곤 했죠.”
울고 싶은 마음은 바로 황씨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배호 선생님 노래에는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음폭이 넓죠. 저음 처리를 잘한다고 하지만 어디 저음뿐입니까. 중간음, 고음 처리까지 능통하신 분이죠.”
배호 노래 부르면 술맛 당긴다고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부르고 금상을 받은 하광성씨(본명 김하광)는 작은 유통업을 한다.
“제가 여덟 살 때 부친을 여의었습니다. 편모슬하에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설움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어렵게 살다가 맏형이 요절하는 바람에 차남인 제가 집안을 끌고 가야 했죠. 인생의 고비도 참 많이 넘겼습니다. 그래서 배호 선생님의 한맺힌 분위기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배호 선생님 노래를 실컷 부르고 나면 화가 가라앉습니다."
목소리가 좋아서 어렸을 때 변사 흉내를 많이 냈고 친구들이 성우하면 좋을 거라고들 했다.
"요즘 들어서 배호 노래가 더 좋아졌습니다. 온몸이 짜릿짜릿해지는 전율을 일으키게 하죠. 배호 노래를 이 노래 저 노래 따라 부르다 보니까 다른 가수 노래는 부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배호 노래만 부르니까 아내와 아이가 미쳤다고 하더군요. 배호 노래를 부르니까 다른 사람들이 배호 노래 참 잘 불러서 술맛 당긴다며 술을 대접해서 공술을 얻어먹을 때도 많죠."
그런 일은 나한테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어느 노래하는 주점에서건 배호 노래를 부르고 나면 옆 테이블 손님이 맥주병을 들고 와 따라준다. '우리는 하나'라는 한의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가수들 노래에서는 배호 선생님 노래에서처럼 혼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배호 선생님 노래를 감상하노라면 그분이 역시 노래를 잘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교롭게도 하광성씨는 황광흡씨와 해병대 동기. 처음엔 몰랐는데 모창대회에서 우연히 만나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얘기를 하다 보니 두 사람이 입대 동기라는 것. 아마 가신(歌神) 배호가 배호에 '미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 모양이다.
"이달 30일에 열리는 배호모창대회에 또 나갈 겁니다. 대상에 다시 한 번 도전해야죠. 하하."
내가 노래를 요청하자 두 사람은 배호모창대회 때 불렀던 <향수>와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각각 불러주었다.
은상을 받은 이하식씨는 '구룡 옥 사우나' 대표. 노래를 부탁하자 아내와 함께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고, 배호 노래로는 <누가 울어>를 불렀다. 서로 바라보는 표정에서 아주 다정한 부부의 금실이 엿보인다.
<막차로 떠난 여자>를 감칠맛나게 잘 부르는 경찰관 가수
마침 경찰관 가수 박인우씨(본명: 박영관)도 와 있었다. 배호 노래 좀 들려달라고 하자 <막차로 떠난 여자>를 부르는데 그 솜씨가 <막차로 떠난 여자> 잘 부르는 다른 가수보다 자연스럽다.
박인우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배호, 이미자, 나훈아, 남진 노래를 좋아했다. 그 중 배호의 목소리가 애절하여 더 좋아했다. 조숙한 판단을 했던 셈이다.
비번일에 근무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할 때 위문공연 등의 봉사활동을 나간다. 배호 노래를 좋아해서 생긴 에피소드는 없느냐고 물으니까 조미미 노래에 얽힌 에피소드를 대신 들려준다(배호의 <마지막 잎새>는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을 작사한 정귀문 선생이 작사한 것).
"조미미 선배님의 노래 <선생님>을 초등학생 때 좋아했습니다. '아,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어도' 이렇게 나가는 건데 5학년 때 소풍 가서 장기자랑 때 그 노래를 불렀다가 담임인 여선생님한테 혼났죠."
DJ는 배호 모창가수 배오
'배호 라이브카페'의 DJ 겸 반주 도우미는 모창가수 배오씨. 그는 배호, 남진, 나훈아, 조용필 노래를 두루 소화해내는 모창가수지만, 오로지 배호 모창가수로서 남기를 원한다. 그만큼 배호의 노래가 위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호의 대표곡인 <누가 울어>의 작곡가 나규호 선생(현재 미국 거주)의 5촌 조카인 김종원씨와 배호의 조카 항렬이라는 배민석씨도 '배호 라이브카페'를 자주 찾는 배호 마니아.
배호는 온화한 미소로 살아 있었다
자정이 지나 30대 직장인 세 명이 들어왔는데, 배호가 살아 있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 싶은 이들도 배호 노래를 부를 줄 알고 배호 노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다. 황광흡, 하광성, 이하식, 박인우, 김종원, 배민석 그리고 30대 직장인들이 노래할 때마다 무대 배경으로 장식한 대형사진 속의 배호는 살아 있는 듯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배호' 이름이 들어간 노래주점 두 군데>
배호 라이브 카페 : 02-430-9595(서울)
배호 매니아들의 작은 공간 : 032-524-0826(인천)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