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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의 전기는 청소년기에 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위인들의 무한한 정신력과 의지는 청소년들의 인간관의 밑바탕을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신의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는 불굴의 인간미를 발견해 낼 수도 있을 것이고, 위인의 초인적 삶에서 얻었던 감동들은 세월의 굴레 속에서도 자신의 인간됨을 확인시켜 주는 내면의 등불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대를 망라하여 위인은 인간의 한 원형으로 사람들의 삶과 이상 속에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시대에, 어렸을 적에는 슈바이처가 살아있는 위인이었고, 청년기를 넘으면서는 마더 테레사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리고 죽의 장막에 가려 있다가 새롭게 위인의 풍모로 다가온 사람은 캐나다 출신 의사 노만 베쑨이었다. 그러나 나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된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더러 그렇게 할 수 있겠냐 했을 때 단연코 '네버(Never)!' 소리가 나온다. 나로서는 엄두가 안 나는 특별한 위인의 삶인 것을.
그들의 위대한 인간미와 인류애에 무한한 감동을 받고, 그들의 진실한 영성의 소리에 내 영혼이 사랑의 세례를 받은 듯 반응을 해도, 나는 나의 조용하고 안락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 결국 나는 인간의 기질을 유형화 하거나, 혹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삶의 주제를 선택하며 사는 것이라고 이해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나(우리)의 삶이 그저 고정되고 안일한 것이라고 치부하지 않는 것은, 나는 그래도 여기까지 인생을 겪었고, 나름대로 살아남았고, 또 어떻게 변화해 갈지 모르는 가능성과 능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활인으로 살아온 내 안에 인간애와 성실함과 선함과 의지력들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기에, 어떤 상황에 처하여서는 그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외면하지 않고 그 자리에 붙들어두며, 함께 나누게 만들 것임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믿고 있었다.
그런 믿음을 다시 일깨워준 책이 제임스 마틴 신부가 쓴 <우리 시대의 유랑자>이다.
<우리 시대의 유랑자>는 '어쩌다가' 아프리카로 파견되어 난민들의 자활을 돕게 된 예비사제의 기록이다. 기본 바탕이 선한 한 젊은 예비 사제와, 분쟁 중인 조국을 떠나 난민 캠프에서 사는 아프리카 인들의 일상적인 이야기, 목숨만큼이나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시간 위를 누비며 흘러가는 인생의 이야기이다.
나는 '어쩌다가' 라는 표현을 했는데, 소명을 느끼는 자들이 갖는 가장 순종적이며 희생적인 태도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제임스 마틴 신부는 조직의 불가항력의 요구에 떠밀려 간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에게 아프리카는 "너무 위험스럽고, 너무 불결하고, 너무 먼 곳"이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난민 봉사는 "참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 자신이 그렇게 머나 먼 곳에 가서 뭘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난민 봉사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피하고 싶은 쓴 잔을 직시하며 받아들이게 만드는 내면의 선한 인간미 때문이었다. 이런 부드러움과 선함이 난민의 처지를 더 잘 이해하게 했고, 백인이라는, 미국인이라는, 거기에 신부라는 특권적 위치에 대한 통찰도 가능하게 했다.
독서는 책 속의 현실과 저자의 사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또 자신의 비전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상당히 특별한 정신적 경험을 나에게 안겨 주었는데, '내가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나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이해가 그것이었다. 그 신부의 행동과 정신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가볍거나 쉬운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신의 선한 의지에 묶이지 않을 사람은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달은 것이다.
성인의 성품의 슈바이처와 마더 테레사, 그리고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보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던 사상과 의지의 의사 노만 베쑨의 초인간적인 인간애에 대해서는 존경에서 끝났지만, 이 신부에게 느꼈던 것은, 인간성을 이해하게 만들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참게 만들고, 결국은 사랑하게 만드는 아량과 선함이었다.
그래서 이 신부가 난민이 아닌 자신의 상태를 표현할 때만큼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과장되거나 초감성적인 소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진정으로 그 행복에 동화되는 것이었다. 부족 간의 전쟁으로, 독재자의 만행으로, 관리의 횡포로 조국에서 쫓겨나고 도망 나와 이국의 오두막과 캠프에서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음에도 답답해지거나 분노가 치밀거나 변화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에 암담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함께 배울 따름이었다.
"당신이 눈여겨보기만 하면 그때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라고 마더 테레사가 말했다(<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말이 사실인 것을 이 책에서 나는 보았다. 나도 피치 못할 어떤 상황에서는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에게로 돌아서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 신부의 심리와 행동은 조금도 극적이거나 따라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 같아도 그렇게 그들을 이해하고, 할 수 있는 한, 내가 거기에 그들과 함께 있는 한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기도 했기에 내 안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세상이, 그리고 그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신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안다. 세상에 그들의 처지를 되돌릴 구세주는 없다. 그들의 조국의 독재자가 평화를 공포하게 되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부패한 정권의 사악한 관리와 경찰들이 회심할 리도 없고, 근본이 취약한 경제는 기근을 이겨내지 못한다. 아무리 유머러스하게 난민의 이야기를 옮기고, 성공적인 자활 사업을 적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밑바닥을 헤매는 난민의 삶이 언제 끝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부에게는 2년의 시간이었지만 그 난민들에게는 목숨이 끝날 때까지일지 모르는 삶들이 아프리카에 펼쳐져 있는데, 자활을 돕는 신부의 하루 생활이나, 하루를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난민의 하루 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이라는 덤덤한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마더 테레사가 가르쳐준 인간의 존엄성과 용기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을 이끌어 나갈 놀라운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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