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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에 연루된 대기업 삼성의 로고. 사건 초기 도청자료를 공개하는 언론에 대해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삼성은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한 후 '대국민 사과'로 돌아섰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대기업 삼성의 로고. 사건 초기 도청자료를 공개하는 언론에 대해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삼성은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한 후 '대국민 사과'로 돌아섰다. ⓒ 삼성
한국사회는 지금 공개된 도청자료를 두고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 논란은 크게 '내용'과 '형식'의 두 차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내용의 측면을 살펴보면, 한 대기업이 정치인에게 막대한 불법정치자금을 지원하면서 기업총수와 혈연으로 연결된 언론사 사장을 고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식'의 문제는, 이 정보의 획득과정이 '도청'이라는 불법적 방식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안기부 도청사건, 무엇이 문제인가?

첫 번째 '내용' 부분은 두 가지 문제점을 담고 있다. 하나는 대기업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대선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불법적인 방식으로 자본력을 동원했다는 것으로, 이는 국민들의 의사에 의해서 운영되는 민주주의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범죄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들의 의사가 정치적 결정과정에 잘 반영되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할 언론사의 대표가 그 불법행위의 공모자였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형식' 부분도 역시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대기업과 정치인의 불법거래를 드러낸 이 자료가 불법적 도청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러한 도청이 정보기관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최근 공개된 도청자료는 해당 기업인, 정치인, 언론인, 그리고 정부기관의 불법행위를 한꺼번에 드러내는 증거가 된 셈이다.

도청행위가 현행법상의 공소시효를 넘긴 시점에서 드러난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논쟁의 초점을 '언론보도의 적합성 여부'로 몰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불법적 방식으로 획득된 정보를 언론이 공개하는 것 역시 불법이며, 이는 당사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사과, 변명, 비난, 그리고 협박

<중앙일보> 인터넷판의 27일자 주요기사. 사건 초기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앙일보>는 도청의 불법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언론에 의한 "매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인터넷판의 27일자 주요기사. 사건 초기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앙일보>는 도청의 불법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언론에 의한 "매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 중앙일보
안기부 도청사건의 당사자들은 '사과', '변명', '비난' 그리고 '협박'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이 문제에 맞서고 있다. '대국민 사과'를 한 삼성과 반성문으로 사설을 대신한 <중앙일보>는 도청관련 보도내용이 '반드시 사실은 아니다'라고 항변하면서도 '물의를 빚은 데 대해 깊이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이 사건으로 자신들을 "매도하고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기도에 대해서는 결연히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로 사과문을 끝맺었다. 삼성 역시 이 문제의 원인이 "불법도청과 무책임한 공개 및 유포"에 있다고 주장하며, 언론사에 대한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문제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건 당사자들만이 아니다. 안기부 도청자료의 언론공개에 대해서 언론사와 법률가, 그리고 학자들마다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언론보도권' 혹은 '국민들의 알 권리'와 당사자들의 '프라이버시'가 충돌할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001년 미국대법원은 이와 유사한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미국 내에서 국민들의 알 권리와 프라이버시, 그리고 불법자료의 언론보도에 대한 사회적 판단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바트니키-보퍼 사건(Bartnicki v. Vopper)'으로 불리는 이 판결은 문화적 차이를 넘어 한국사회의 논란에 중요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미국판 'X파일', '바트니키-보퍼 사건'이 주는 교훈

이 미국판 도청사건의 발단은 1993년 펜실베이니아 주 내의 한 학군을 대표하는 교원단체와 교육위원회 사이의 임금인상 협상안이었다. 당시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개인이 조합장 앤서니 케인과 협상위원 글로리아 바트니키 사이의 전화내용을 도청녹음한 후, 그 조합에게 적대적인 단체의 우편함에 녹음테이프를 넣어 놓았다. 문제의 테이프는 단체장의 손을 거쳐 라디오 진행자인 보퍼에게 전달되었고, 케인과 바트니키 사이의 사적 대화는 시사프로그램을 타고 대중들에게 여과 없이 방송되었다.

"만일 그들이 3% 인상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집에 찾아가서 현관이라도 날려 버려야 해. 정말 어떤 식으로도 그 친구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니까."

이에 분개한 바트니키와 케인은 방송인 보퍼가 도청을 금하고 있는 연방법과 주법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법과 펜실베이니아주법은 개인간의 전화 내용을 도청하거나 그 과정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트니키 대 보퍼" 사건의 판결문
"바트니키 대 보퍼" 사건의 판결문 ⓒ 미연방대법원
법원은 프라이버시권과 언론보도권 모두가 헌법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지만, 언론자유의 보장이 엿듣는 행위를 금하는 법률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결했다. 당시 사건의 담당판사였던 존 폴 스티븐스는 이 사건이 "공적 이슈에 대한 정보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확산이라는 기본권과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기본권이 충돌한 경우"로 해석했다.

스티븐스 판사는 판시문에서, 비록 그 정보가 도청이라는 불법과정을 통해 얻어진 경우라도 공개자가 도청행위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정보가 공익과 중요한 연관성을 맺는 경우라면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공개된 정보는) 대중들에게 중요한 사회적 의제에 관한 문제를 담고 있기에, 비록 도청이 불법행위라도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수정헌법 제 1조의 보호를 중지할 만한 정도의 위법으로 보기는 어렵다." — "Bartnicki v. Vopper," 532 U.S. 514 (2001) Docket Number: 99-1687

'알 권리'와 '프라이버시 보호'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법원은 미국정부가 <뉴욕타임스>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서도 같은 유사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가 제 3자가 훔쳐낸 정부자료를 기사에 인용해서 보도했지만, 그 내용이 대중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자료의 불법성보다는 공개결과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판결이었다. '알 권리'와 '프라이버시'는 모두 중요한 기본권이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에 중점을 둘 것인지는 정보의 내용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 법원이 '알 권리'를 위해서라면 '프라이버시'는 언제든 침해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2000년 7월, 뉴올리언스 상소재판소는 도청된 내용을 보도한 방송사(WFAA-TV)의 기자 로버트 릭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바퍼나 <뉴욕타임스>의 경우와 달리, 그는 도청방법에 대해서 조언을 하고 도청을 계속할 것을 부탁함으로써 도청이라는 불법행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대법원 건물.
미국 연방대법원 건물. ⓒ 강인규
도청자료에 대한 언론보도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언론보도자가 도청행위와 연관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정보가 사회구성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트니키-보퍼 사건'은 비록 개인의 사적인 대화를 둘러싼 것이었지만, 이들의 대화는 교원들의 급여인상이라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다루고 있었다.

이번 안기부 도청사건 역시 한 개인의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문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는 국민 한 명 한 명의 의사표시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치의 결정과정을 불법적 자본을 통해 바꾸려 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 사건이 대중과 무관하다면 도대체 어떠한 정보가 공익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통신비밀보호법의 목적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불법행위를 보호하는데 있지 않다. 도청의 두려움 때문에 개인의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당사자들은 도리어 언론의 입을 막음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시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 언론사 자신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홍석현 회장의 탈루혐의가 "선거에서 상대 진영을 도왔다는 괘씸죄"였으며, 이번 사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두 번 다시 그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을 언급한 언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매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 신문의 경고다. 삼성은 '대국민 사과문'에서 "금번 사태의 원인이 된 불법도청과 무책임한 공개 및 유포는 개인의 인권 확보와 우리 사회의 민주발전을 위해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탈법행위가 우리사회의 민주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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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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