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씨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거의 모든 언론이 김현철씨의 이름 석자를 기사 제목에 올리면서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이 불법도청팀인 '미림'을 부활시킨 배후 아닌가?"
김현철씨가 '황태자' 또는 '소통령'으로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결정적 계기가 G클리닉 박경식 원장이 설치한 폐쇄회로 TV 때문이었음을 상기하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볼 수 있는 질문을 언론이 집중적으로 던지고 있다.
언론의 집중 보도에는 계기가 있다. <미디어오늘>은 어제, 김대중 정부 초기에 국정원으로부터 각종 고급정보를 보고받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김현철씨가 미림팀을 기획총괄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열린우리당의 민병두 의원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불법도청의 배후로 김현철씨를 지목했다.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면서 주목하는 점은 김현철씨의 인맥이다. 문민 정부 시절 '황태자' 또는 '소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김현철씨가 경복고-고려대 인맥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언론은 이런 사실에 기초해 미림팀 부활을 직접 지시한 오정소 전 안기부 대공정책실장이 김현철씨의 '배후 조종'을 받고 일을 꾸몄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오정소 전 실장 또한 경복고-고려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김현철 감독-오정소 주연' 시나리오를 제기하는 근거가 학맥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오정소 전 실장 보좌관을 지낸 김기삼씨는 지난 22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미림팀의 불법도청 결과가 오정소 전 실장을 거쳐 이원종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현철씨에게 직보됐다고 밝힌 바 있다.
<오마이뉴스>도 27일자에서 익명을 요구한 전직 안기부 간부의 말을 인용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안기부의 현장도청팀 '미림'의 재구성 및 활동의 실질적 배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와 오정소 전 안기부 차장이다"고 밝혔다. 이 안기부 간부는 "당시 오정소 차장은 대공정책실장 시절부터 '미림'팀의 도청 보고서를 김현철씨와 이원종 정무수석에게 직보했다"면서 "그런 정보 제공 덕분에 차장까지 승진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안기부의 정상적인 지휘계통, 즉 차장과 부장 라인을 건너뛰어 이원종-김현철 라인으로 직보됐다는 김기삼씨의 증언은 미림팀 부활이 공식라인이 아니라 사선에 의해 주도됐음을 감지할 수 있는 강력한 단서다. 미림팀 해체와 재구성 결정과정이 공식라인에 의해 이뤄졌다면 미림팀의 불법도청 내용이 사선을 통해 보고됐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기삼씨는 당시 김덕 안기부장은 미림팀의 존재를 몰랐다고 밝혔다.
이 사실에 대해 이원종 전 수석과 김현철씨는 적극 부인하고 있다. 이원종 전 수석은 <조선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그런 사실이 없고, 정상적인 업무수행과정에서 직무와 관련된 정보를 받은 것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현철씨측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선이 가동됐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은 또 있다. 25일에 발행된 <시사저널>이 김기삼씨의 증언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경질된 것은 미림보고서에 걸렸기 때문"이라며 "박 실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이 청와대에 자기 사람을 심는 등 전횡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당했다, 박상범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도 술자리에서 취중에 현철을 비난한 내용이 도청에 걸려 잘렸다"고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김광일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에는 김 실장과 당시 이원종 정무수석이 언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이 수석이 '김 실장의 통화 내용을 듣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일'을 거론, 김 실장이 '나까지 도청하느냐'고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사례들이 뜻하는 건 뭘까? 미림팀의 보고서가 청와대 비서진의 최고 수장인 비서실장조차 무시하면서 특정인에게 직보됐으며, 미림팀 보고서가 김현철씨 보위에 사용(私用)됐다는 뜻이다.
미림팀이 안기부장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비밀리에 부활됐고, 미림팀의 불법도청 내용이 사선을 통해 보고됐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여러 정황 속에 김현철씨가 주연으로 등장하고 있다.
정황이 이 정도까지 제기됐다면 국정원의 김현철씨 조사는 불가피하다. 대공 또는 산업스파이 용의점이 없는 민간인에 대한 조사가 국정원법에 규정된 권한 밖의 일이라면 검찰이 나서 수사할 수도 있다.
김현철씨를 꼭 수사해야 하는 이유가 단세포적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누가 미림팀 구성을 지시했는가"라는 궁금증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미림팀의 불법도청 내용을 누가 어떻게 악용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이를 통해 문민 정부 이름 밑에서 자행된 반문민적 공작 실태가 밝혀져야 한다.
'누가 어떻게 악용했는지'를 밝히다 보면 뜻밖의 수확을 거둘 수도 있다. 김현철씨는 지역 민영방송 허가과정에 개입해 이권을 챙긴 혐의 등으로 사법처리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김현철씨와 그 측근들이 행한 갖가지 국정 농단 사례는 여전히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김현철씨가 이른바 '광화문팀'이란 사설 조직을 만들어 비밀리에 여론조사를 한 뒤 그 결과물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악용했고, 아버지대로부터 이어온 이른바 YS장학생들과 결탁했다는 등의 정보와 첩보는 무수히 많았다. 이중 일부는 언론의 취재 결과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지만 그 총체적 실체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국정 농단 세력의 머리격이었던 김현철씨가 지금 또 다시 불법도청의 배후 조종자 의심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던 실탄, 즉 비밀 정보가 불법도청 내용과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필수다.
김현철씨측이 이미 세간의 의혹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밝힌 만큼 그가 수사를 기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것 외에도 김현철씨가 불법도청 사건 수사에 적극 응할 수도 있다고 보는 이유가 더 있다.
김현철씨가 '황태자' 또는 '소통령'으로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결정적 계기는 그가 찾던 병원인 G클리닉의 박경식 원장이 설치한 CCTV 때문이었다. 그가 국정을 농단하는 한 장면이 비밀 CCTV에 포착돼 공개됐기 때문인데, 이 때의 기억을 뼈저리게 간직하고 있을 김현철씨라면 수사를 기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불법도청과 관련된 세간의 의혹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측"이라면, '몰래 촬영'과 불법도청의 근절을 위해 헌신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