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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주인은 저녁 나절 휘어져 있는 돌바닥 길 옆쪽에 있는 화단 둘러보고 이끼 밟으며 들어가면서, 안쪽으로 가지 휜 나무와 자잘한 농기구, 노곤한 기운까지 많은 것과 해후하며 휴식처에 들 것이다.
이 집 주인은 저녁 나절 휘어져 있는 돌바닥 길 옆쪽에 있는 화단 둘러보고 이끼 밟으며 들어가면서, 안쪽으로 가지 휜 나무와 자잘한 농기구, 노곤한 기운까지 많은 것과 해후하며 휴식처에 들 것이다. ⓒ 박태신
마음으로 발견한 첫 번째 집. 마당에 화단이 있고 수돗가가 있습니다. 전깃줄과 빨랫줄에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습니다. 비올 때 발걸음을 조금만 늦추면 이런 모습이 내 시선을 잡아당기곤 합니다. 중력과 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태. 아니 빗방울의 장력이 지구의 중력을 억세게 견디고 있는 상태. 마당이 있어야 쉽게 볼 수 있는 모습.

빗방울의 장력은 덧붙여진 다른 빗물의 무게가 덧붙여 자기 스스로 떨어질 때 무너집니다. 뭉쳐서 무너지는 빗방울도 이 마당의 식구입니다. 마당이 있는 집은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마음가짐이 다를 것 같습니다. 아파트와 빌라가 주지 못하는 기다란 막간의 틈새 시간이 있습니다.

다른 골목. 대문 옆 마당 공간을 작은 방(창고나 화장실?)으로 활용하고 녹색 차양으로 좁은 마당을 덮은 조금은 폐쇄적인 집. 옥상을 활용해 좁은 마당을 보충합니다. 옥상 위로 전깃줄이 오고갑니다. 빌라나 높은 건물이 많은 도시의 주택가에서는 전깃줄이 지붕이나 옥상을 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곳의 단층집은 또 다른 지붕인 하늘을 배경 삼아 전깃줄에 앉은 새들, 몸체로 들썩이다 떠나는 바람, 집의 전신에다 물기를 적시는 비와 눈을 손님으로 맞이합니다.

빈틈없어 보이는 집. 모퉁이의 큰 돌멩이를 무슨 용도로 가져다 놓은 것인지 궁금하다.
빈틈없어 보이는 집. 모퉁이의 큰 돌멩이를 무슨 용도로 가져다 놓은 것인지 궁금하다. ⓒ 박태신

그 옆의 다른 단층집. 이 집은 반대로 마당을 잘 꾸민 집입니다. 나무를 심어놓고 창을 통해 낮은 담 너머 밖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이나 옥상의 울타리 담을 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옥상을 넓혀 차양 역할을 하게 했고, 예술 작품 같은 기둥을 한 가운데 세워놓아 주변과 잘 조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위에 소개한 집과 같은 골목이지만 이 집의 주인은 개방적인 것 같습니다.

마당에서도 하늘 볼 수 있고, 담 테두리에도 색을 입혔다.  담은 낮은 대신 창은 커다란 집. 모퉁이엔 풀 한 포기도 자리잡았다.
마당에서도 하늘 볼 수 있고, 담 테두리에도 색을 입혔다. 담은 낮은 대신 창은 커다란 집. 모퉁이엔 풀 한 포기도 자리잡았다. ⓒ 박태신

저는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집에 대한 명상 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책 <공간의 시학>과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의 집에 관한 부분을 보십시오. 저는 이 사람의 책 이 부분만을 조금씩 다시 읽곤 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끄떡없는, 숲 속이나 벌판의 오두막집에서 안전하게 머무르는 몽상을 그 사람 파리 한복판의 아파트 안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해 했습니다.

함양의 집들은 그런 의미에서 행복한 곳 같았습니다. 집 둘레의 넓은 공간, 집마다 개성적인 모습, 낮은 담, 넓은 창, 그리고 적은 소음. 함양 주택가 골목을 거닐면서 행복한 몽상을 저도 했습니다.

또 다른 골목. 주택가 한가운데 작고 예쁜 2층 양옥집이 있어 사진 찍으려다 말았는데 대문가에 이런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노모당'(老母堂). 이곳 노인정의 독특한 이름입니다.

꼭 전망대의 고정 망원경처럼 생긴, 뒤쪽 아파트의 지붕 위 구조물. 앞쪽의 아파트엔 마치 사람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넓어 보인다.
꼭 전망대의 고정 망원경처럼 생긴, 뒤쪽 아파트의 지붕 위 구조물. 앞쪽의 아파트엔 마치 사람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넓어 보인다. ⓒ 박태신

함양에도 아파트가 있습니다. 시내를 지나 단독 주택가를 지나면 나오는데 지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산뜻해 보였습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아서 아파트는 유독 높아 보입니다. 아파트 형태이긴 하지만 옥상의 모양이 남다릅니다. 한옥처럼 경사진 지붕인데다가 그 위에 장난감 모형 같은 작은 구조물을 얹혀 놓았습니다. 옥상 출입구이면서 아파트 관리공간이겠으나 아파트의 개성을 나타내는 데 한몫을 합니다.

여러 세대가 똑같은 구조의 집에서 사는 곳이 아파트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습도 획일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파트 아이들과 골목이 많은 주택가의 아이들의 정서상 표현방식도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 아파트의 옥상 구조물이 상상력을 조금 자극해 다행입니다.

기와에 기와를 얹었다. 불규칙하게 쌓인 것이 아래 돌담 구성방식과 닮았다. 매끈하게 마름질 하는 시멘트 벽과는 다른 정서. 매끈하려고만 하다가 금이 가고 말지.
기와에 기와를 얹었다. 불규칙하게 쌓인 것이 아래 돌담 구성방식과 닮았다. 매끈하게 마름질 하는 시멘트 벽과는 다른 정서. 매끈하려고만 하다가 금이 가고 말지. ⓒ 박태신

이제 마지막 집. 아마도 못쓰게 된 기와이겠습니다만 기와를 담장 위에 얼기설기 얹어 놓았습니다. 모양새도 규격도 불규칙한 것이 마치 사찰 일주문 양 옆의 돌담 같습니다. 크기가 다른 것을 섞어 하나의 아름다운 돌담을 만들어냅니다. 이 집의 기와 아래도 투박하지만 그런 돌담이지요. 건축가 임석재의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이라는 책에 이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 기왓담(?)이 바람에 떨어지지 않도록 돌멩이 매단 줄을 걸쳐 놓은 것입니다. 어디 가서 보기 힘든 풍경입니다. 사진 속에는 네 개의 줄이 걸쳐 있는데 사이좋게도 돌담 위 시멘트벽에도 네 개의 긴 금이 그어져 있네요. 역시 시멘트는 돌이나 흙보다 못합니다.

오후에는 함양에서 버스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개평마을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 곳에 담장이 없는 집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집이고 집안의 누추한 모습까지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으로 정을 덧붙여 집을 꾸몄습니다. 담장이 없거나 낮은 것은 남도지방의 따뜻한 기후와 인심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 단장한 집들도 담이 낮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함양 시내의 양옥집들도 그렇습니다. 담 너머 사는 모습을 애써 볼 이유야 없겠지만 높은 담으로 시야를 가리고, 오르지 못하도록 유리조각을 박아 놓는 일은 없습니다. 이제 함양 시내에도 여러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 싶겠지만, 아파트 안에서도 이런 개방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함양의 집들은 지붕이 두 개 있습니다. 기존의 지붕과, 하늘이라고 하는 넓은 지붕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지붕이 두 개 있는 집'이 아니라, '지붕을 두 개 이고 사는 집'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집이 살아야 사람도 살지요.

덧붙이는 글 | 지난번 글, 남원의 '혼불 문학관'을 걸쳐 들른 함양을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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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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