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순안공항 청사 앞에서 30도를 웃도는 더위를 무릅쓰고 도착성명을 발표하는 동안 북의 기자들은 취재경쟁을 벌이느라 분주했다. 물론 남쪽에서도 많은 신문기자와 방송국 카메라들이 동행했지만 북의 방송사나 신문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그 수가 생각보다 여럿이어서 놀랐다.
성명과 취재가 끝나자 북측 사진사가 단체사진을 찍겠으니 대형을 맞추어 잘 서달라고 했다. 우리는 환영 플래카드를 중심으로 앉고 서서 그 부탁에 따라 주었다. 그중 언변이 좋은 사진사 한 사람이 알루미늄 사다리를 놓고 높이 올라가서 좌중을 향해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나서 김치를 하면 찍겠으니 그렇게 해달라고 하여 우리 일행은 김치를 해주었다.
그런데 사진사는 잘 안됐다고 이번에는 더 크게 '신김치'를 하자고 해서 박장대소를 하고 촬영이 끝났다. 그이는 우리가 평양을 떠날 때까지 동행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우리는 '신김치'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여주었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외국이었다면 다함께 '치즈' 나 '스마일'하며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아! 모국어의 통쾌함이여! 나는 그 후로도 신김치 사진사에게 사진을 박힐 때 마다 그의 너스레와 입담에 한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야트막한 2층으로 지어진 순안공항은 방송에서 보아온 것보다 더 아담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났을 당시에 보았던 공항은 수많은 군중과 꽃다발의 물결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건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공항건물보다는 두 정상과 숨 막히는 분위기가 모든 것을 압도해 버렸던 모양이었다. 검게 그을고 마른 군복 차림의 안내원이 청사 정문에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거의 모든 북쪽 사람들은 우리보다 검고 날씬해서 건강해 보였다. 외부활동이 많고 음식을 싱겁고 달지 않게 먹는 식습관이 그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짐을 찾기 위해 불을 꺼 놓아 약간 어두운 대기실에서 밖을 기웃거리며 조바심으로 안달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윽고 짐이 나왔고 공항 직원은 내가 검색대를 통과하자 끌고 다니는 여행용 가방을 열어보자고 했다. 순간 당황했지만 별 내용물이 없는 터라 순순히 가방을 열어 보여 줬다. 내가 가져간 잡지와 시집을 보더니 무슨 책이냐고 하기에 "제 시집입니다"했더니 내 시집 제목 (내 마음 속 게릴라)을 읽은 듯 '게릴라? 게릴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고 "이 책은 또 뭡니까?"하였다. "이 책은 제가 관여하는 잡지사에서 나온 계간잡지입니다"고 했더니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쉽게 나가도 좋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출발 전에 책자와 망원렌즈 등 가져가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하여 주의를 받은 터라 상당히 긴장하고 조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북측 당국자들은 생각보다 우리를 신사적으로, 북측의 관례로는 파격적이라 할 만큼 넓게 우리를 대하려고 노력하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회기간을 통하여 느낀 생각이지만 남북작가대회의 준비가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고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쌍방이 모든 분야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형수 사무총장, 정도상 상황실장, 방현석 의전담당 그리고 북의 장혜명 선생은 헌신적으로 서로를 낮추고 대의를 지켜내기 위해 무단히 참고 견뎌내는 모습은 차라리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평양을 떠나기 전날 밤 그들은 극도의 긴장과 피로와 성취감으로 술 몇 잔의 힘을 빌어 엉엉 울었다고 한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안내원들이 청사를 빠져나오는 우리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탑승차량을 확인해 주었다. '교통안전'이란 글귀를 쓴 경찰차가 선도에 있었고 의장단이 탈 벤츠 두 대와 상황실 요원들이 탈 현대자동차의 스타렉스 승합차 그리고 대형버스 네 대가 우리를 조별로 나누어 싣고 공항을 서서히 나섰다. 시간은 벌써 2시로 막 접어들고 있었으니 안개로 늦어진 출발로 인해 이미 사전계획대로 움직이기에는 한참 늦은 시각이었다.
4호차에 오르자 조장들을 통해 인원점검이 있었다. 돌아올 때까지 계속된 일이지만 안내원들은 인원점검에 많은 애를 먹는 것 같았다. 다른 차에 탄 사람, 매번 늦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북의 안내원들은 그래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요령있게 우리를 이끌어 갔다. 북에서의 여행이 반드시 안내원을 동행하여야만 가능한 것이어서 그들은 인원파악에도 이력이 붙어서 매우 신속하게 그 일을 해내고 있었다.
우리 4호차에는 네 명의 안내원이 동승했다. 먼저 황원철씨가 자기를 조선작가동맹 소속의 소설가라고 소개한 뒤 박철, 김신협, 심기섭씨를 소개했는데 박철 선생은 시인이고 뒤의 두 사람은 민화협(민족화해협력위원회) 소속이라고 했다. 으뜸 원에 밝을 철자를 쓴다는 황 선생은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을 하였다.
"오늘 이렇게 우리 평양을 방문해주신 남측의 작가 선생님들을 열렬히 환영합네다. 우리들이 하나의 붓대를 잡게 된 것을 역사는 바로 기록할 것입니다."
이렇게 제법 장엄하게 운을 뗀 황선생은 자상하게 우리들이 차내에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승차 시에는 촬영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순안은 평양에 속하는 구역이지만 시골이나 한가지여서 논과 밭이 이어졌다. 나는 한 가지도 빠짐없이 보려는 듯 북의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였다. 자전거를 탄 학생들은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농부들은 여럿이 모여 옥수수를 베고 있었다. 개천에서는 미역을 감거나 쪽대로 물고기를 잡느라 덤벙대는 모습은 신기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황석영 선생이 북을 방문하고 돌아가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쓴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그 책의 제목이 너무 슬프고 아련해서 많은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두절과 오해와 사상교육으로 말미암아 저런 당연한 제목이 말이 될까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땅을 칠 노릇이었다.
9.9절 거리로 차량이 접어들자 황 선생은 창군 50돌을 기념한 공사를 통해 건설된 다리라고 설명하며 자신도 5일간 직접 공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감회를 말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씌여진 영생탑은 그 높이가 굉장히 높았다. 시내로 접어들자 안내를 맡은 황선생은 이런저런 건물들을 설명해 주었는데 특히 금수산 기년궁전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1998년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대해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울었으며 외신은 거성이 떨어졌다라고 보도했답니다. 어떤 신문은 지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이렇게 우리 수령님의 서거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생각보다 평양에는 높은 건물이 모여 있었는데 그것은 묘하게도 40층이나 되는 아파트였다. 건물외장은 아주 투박한 색을 띠고 있었는데 구석구석에 이런 아파트 군은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관청들은 제법 웅장한 자태를 지닌 것들이 많았는데 그곳에는 틀림없이 각종 구호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 '우리를 건드리는 자 죽음을 면치 못 한다'라는 구호는 지금 북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살자'라는 구호도 그 이유가 느껴지는 듯했다.
남측대표단의 차량이 다 도착하여 우리 일행은 고단하기도 하고 긴장도 되어 다소 느린 걸음으로 평양고려호텔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의 우려와 고단함을 일시에 씻어주는 모습이 있었으니 고려호텔 전 직원들이 로비에 나와서 뜨거운 박수와 인사와 화사한 웃음으로 맞아 준 일이었다. 남측 대표단들도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를 연발하며 서로 박수를 치며 한참 동안이나 호텔이 떠나갈 정도로 인사를 나누느라 몇 안되는 외국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우리들의 상기된 만남의 인사를 지켜보고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