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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속 조선인 소녀들이 나고야 미쯔비시 중공업의 한 사감방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머리띠에는 神風(가미가제)이라고 쓰여 있다. 앞열 우측이 원고중의 한 명인 양금덕씨. 소송단이 제공한 사진.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속 조선인 소녀들이 나고야 미쯔비시 중공업의 한 사감방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머리띠에는 神風(가미가제)이라고 쓰여 있다. 앞열 우측이 원고중의 한 명인 양금덕씨. 소송단이 제공한 사진.
"3일 동안 충남과 대전지역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찾기 위해 구청, 학교, 노인정 등 곳곳을 둘러 들어봤지만 아쉽게 됐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찾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자신이 군 위안부로 오해 받을 것을 두려워 신고조차 꺼려하는 분위기입니다."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 보상 소송'의 변호를 맡고 있는 우치가와 요시카즈(內河惠一·66) 변호단 단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소송이 있기까지는 원고들의 용기가 얼마나 컸던 것인가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일본 정부와 나고야 미쯔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과 관련한 피해 책임을 묻는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일본인 변호단과 지원회 등 일행 4명이 지난 7월 30일 광주를 방문, 소송 원고들을 찾아 재판 상황과 관련한 의견을 나눴다.

"군 위안부 오해, 한국에서는 신고조차 꺼려"

지난 99년 3월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회장 이금주) 소속 김혜옥씨 등 피해자 7명이 일본 정부와 나고야 미쯔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은, 재판 6년여만인 지난 2월 나고야 지방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은 바 있다. 65년 맺은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것이 그 이유.

원고들은 즉각 항소를 제기한 상태이며, 오는 9월 28일 나고야 고등법원에서 첫 심리재판이 진행될 예정이다. 변호단 일행은 항소심 첫 재판을 앞두고 당시 피해자가 더 생존해 있는지를 확인하는 한편, 재판 상황과 관련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 지난 27일 한국을 방문했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사진첩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지난 얘기를 쏟아내고 있다. 30일 일본 변호단 일행이 광주를 방문했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사진첩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지난 얘기를 쏟아내고 있다. 30일 일본 변호단 일행이 광주를 방문했다. ⓒ 광주드림 안현주
우치가와 요시카즈 변호단장은 "비록 1심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지만 우리의 활동이 완전히 고립돼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기각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번 판결 소식이 이례적으로 일본 신문과 방송 등에서 연일 대서 특필됐다"며 "이를 계기로 그동안 역사적 진실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최근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아울러 1심에서 기각 판결의 주요 근거가 된 한일협정에 대해서는 청구권 소송과 별개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우치가와 요시카즈 변호단장은 "한일협정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마무리됐다고 볼 수 없다"며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 문제를 다룬 것일 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다뤘던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설사 한일협정으로 한일 양국 간에는 어떻게 마무리 됐는지는 몰라도, 이것을 근거로 국가가 개인들의 청구권까지 영구히 소멸시킬 수는 없다"며 "따라서 한일협정이 이번 소송을 기각할 사유가 되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우치가와 요시카즈 변호단장은 마지막으로 "원고들은 주변의 오해에서 비롯된 시선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맨 선두에 서 계신 분들"이라며 "다행히 한일협정 40년만에 한국 내에서도 이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실조사 활동이 펼쳐지고 있어, 이런 움직임에 힘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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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법원, 미쯔비시 근로정신대 손배 '기각'


"재판 대비 지원단 활동에 박차"
항의 엽서 보내기·한일협정 문서 공개 요구 등

6년 세월 끝 '기각' 판결.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이 6년 세월을 끈질기게 버텨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소송을 음으로 양을 후원해 온 일본내 '지원회' 활동을 빼 놓을 수 없다.

지원회는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 100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각종 활동을 통해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한편 일본 내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원고들이 증인 심문차 수십 차례 일본법정을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지원회가 교통편과 숙박비 일체를 마련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장 사진 등 재판에 쓰인 당시 귀중한 역사적 사료 등도 이들의 활동으로 수집된 것. 지난 1988년 해방 직전인 44년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때 숨진 조선인 소녀 6명에 대한 위령비를 세운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당시 기숙사 사감의 아들이 보관 중인 사진첩을 공개해 변호단에서 입수하게 된 것이라고.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 위해 나선 것일 뿐"

지원회는 지난 2월 기각 판결 직후, 원고들과 함께 일본 내각과 미쯔비시 중공업, 국회의원 회관 등을 찾아가 맹렬히 성토하기도 했다. 지난달 18일에는 일제 강점 상황과 관련한 일본 내 진상규명 네크워크를 결성,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피해 사실을 조사하는 한편 일본 내에서도 한일협정 문서 내용을 공개할 것을 촉구할 계획이다.

지원회는 오는 9월 첫 변론을 앞두고 지난 달부터 미쯔비시 중공업과 나고야 고등법원에 제출할 일종의 항의 엽서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쯔비시 중공업에는 사죄를, 나고야 고등법원에는 법 원칙에 맞게 판결해 사법부로서 역사적 책임을 다해달라는 것이 주 내용.

다카하시 마코도(高橋 信) 지원회 대표는 "법정에서 오열하던 할머니들을 잊지 못한다"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다할 뿐"이라고.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 전라북도 여자근로정신대(2003년 독립기념관 특별 기획전 사진자료)
ⓒ독립기념관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이 짙어지던 1944년 5월경 군용 경비행기를 제작하던 나고야 미쯔비시 중공업 군수공장에 조선 소녀들을 동원해 감금 속에 강제노동을 시킨 사건이다.

일본인 교장과 헌병들은 당시 초등학교 5, 6학년이던 12∼14세 소녀들을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학교에도 보내 준다'고 이들을 속였다. 전남지역의 경우 광주, 나주, 여수, 순천, 목포 5개 초등학교에서 140여 명의 소녀들이 강제 동원됐다.

군 위안부 오인, 가정생활마저 파탄

피해자들은 당시 임금 한 푼 없이 군용 항공기를 생산하는 이 공장에서 배고픔에 허덕이며 하루 10시간씩의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특히 44년 12월에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사건으로 최정례씨 등 당시 강제동원 조선인 소년 6명이 건물더미에 깔려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은 '급여는 저축했다가 나중에 조선에 돌아갈 때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당한 상처와 한은 귀국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봉건 의식이 강했던 당시의 시대상에서 이들을 군 위안부로 오해했던 것.

특히 혼령기를 맞은 피해자들은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오가던 혼담이 깨지기 일쑤였다. 비록 결혼에 성공했더라도 뒤늦게 남편이 이 사실을 들어 이혼을 요구해 오는 등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70대가 넘는 고령으로, 원고 7명 중 한 명은 6년여간 이어진 지리한 소송 과정 중 사망하기도 했다. 남은 이들도 당시 고된 노동과 부상 등으로 지금껏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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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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