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고려호텔 직원들의 신선한 환영인사로 한결 마음이 푸근해진 남측대표단은 출발 지연으로 늦은 점심을 호텔 식당에서 서둘러 먹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평양랭면'의 맛을 보게 된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널린 게 냉면집이긴 하지만 냉면의 본고장인 이곳에서 먹는 감회는 북에 와서 먹는 첫 번째 식사라는 의미와 맞물려 새롭고 설렘이 더했다.
호텔 측에서도 미리 준비가 되어 있은 듯 신속하고도 정연하게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물수건이 먼저 왔고 음료수가 나온 후 바로 녹두지짐과 배추물김치가 나왔다. 한복을 차려 입은 접대원들은 손에 익은 솜씨와 웃음까지 담아내며 '녹두지짐입니다'라는 여리면서도 애교 넘치는 어투를 연출했다.
녹두지짐은 디스켓만한 크기의 것이 얇게 두 장이 나와서 우선 시장기를 가셔 주었다. 곧이어 소고기 구운 것이 작은 접시에 나왔는데 오래 전 가족소풍이라도 갈 때 간장으로 갖은 양념하여 연탄불에 구워 찬합에 담아 갔던 그 맛이었다. 전체적으로 간은 싱거운 편이었고 조미료가 적게 들어간 담백한 맛이어서 좋았다.
룡성맥주나 평양소주까지 한 잔씩 걸친 일행들은 느긋한 심정으로 각자의 방에 돌아가 오후 일정에 계획된 인민문화궁전에서의 민족작가대회 본회의와 환영연회를 기다리며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평양의 낯설고 신기한 분위기를 모든 촉각을 곤두세워 가며 킁킁대고 있었다.
나는 성균관대학교 김성수 교수와 함께 24층의 22호에 방을 배당받았다. 마침 김 교수는 북의 현대문학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로 정평이 있는 학자였다. 호텔의 후면인 우리 방에서는 지하보도에서 드나드는 사람들과 고층 아파트가 잘 보였고 멀리로는 평양역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열차의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학생들이 열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어서 아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방 안에는 침대 두 개와 텔레비전, 의자 두 개가 있었고 따로 둘이서 담소하거나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탁자와 의자가 별도의 공간에 마련되어 있어서 우리가 밖을 내다보기에 좋은 장소가 되었다.
화장실에도 다른 호텔과 마찬가지로 칫솔 치약은 물론 '향머리물비누'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쓰다 남은 향머리물비누를 아들놈에게 보여 주었더니 대번에 '아하! 샴푸'하며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조금 길고 불편해도 우리말을 쓰며 지키는 고집은 쓸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나는 일부러 아이들과 '고져 향머리물비누 좀 가져오라'라고 농담을 하면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다.
국제전화번호 안내장에는 '가나'로 시작해서 거의 모든 나라들의 국가번호가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제일 가까운 대한민국의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과거에 비해 남과 북은 정말 많은 교류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허용되고 인정되어야 하는 법적 근거들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지 못한 듯 했다.
남의 주적 논란과 보안법이 그것이오, 북의 여러 가지 주장들도 우리의 교류에 방해를 주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럴 바에야 남북이 현 실정에 맞게 법적 장치를 바꾸고 적극적인 교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서주기를 간곡히 기대해 본다.
두런거리며 밖을 살펴보기에 분주한 우리들에게 상황실에서 전갈이 왔다. 갑자기 북측에서 회의의 주체에 남과 북은 물론 해외동포의 자격으로 일본 총련계를 넣자고 하는 주장이 엇갈려 행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객실에서 텔레비전을 틀어 보기도 하였으나 화면조정표시만 나올 뿐 아직 방송이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달력을 이리저리 넘겨보았다. '수령동지 서거일',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 선생 탄생일' 등의 자세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다섯 시가 되니 중앙방송이 방송을 시작했다. 우리가 기내에서 보았던 <로동신문> 기사소개가 이어지고 나는 무감동으로 이어지는 뉴스에 전원을 끌 수밖에 없었다.
창광거리는 마침 퇴근시간이어서 많은 인파들이 가방과 짐을 들고 움직이는 모습이 한가롭다. 차도가 그려져 있지 않은 넓은 길에는 사람도 차도 천천히 굴러 가고 있다.
여섯 시 이십 분이 되어서야 우리는 긴장과 초조함을 풀고 인민문화궁전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남과 북의 대표들이 결국은 대의를 저버리지 않고 의사진행에 합의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호텔 앞에 정차되어 있는 버스에 오르며 호텔 앞에 있는 승리식당과 약산(아마도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영변의 약산인 듯) 식당을 보았다.
소불고기와 한정식을 하는 집 같았는데 드나드는 손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을 했다. 자, 이제 우리는 60년의 단절을 뚫고 남과 북의 작가들이 하나 되는 역사의 현장으로 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