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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열린우리당을 향해 물었다. “검찰에 맡기자더니 웬 특별법인가?” 불법 도청테이프 공개 문제를 풀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려는 열린우리당을 향해 “바르고 쉽고 간명한 길”, 즉 검찰 수사를 굳이 마다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동아일보>가 내리고 있다. <동아일보>는 열린우리당이 특별법 제정을 제안하기에 앞서 청와대 측과 긴밀한 교감을 나눴다면서, 열린우리당 한 의원의 입을 빌려 “청와대의 생각은 불법 도청 테이프의 진상을 공개하자는 것”이며 “현재의 여론으로 볼 때 어떤 형식이든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청와대의 판단인 것 같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진실만이 답이고 진실만이 내 편으로, X파일 문제는 진실대로 갈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법대로’가 아니라 ‘진실대로’를 언급한 것이다.

여권이 특별법 제정 방침을 세웠다고 해서 곧장 현실화될 것 같지는 않다. 야4당이 특검법안을 이번주에 국회에 제출하기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여소야대 국회 상황을 감안하면 특별법보다는 특검으로 기울 공산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야4당의 합의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여권이 굳이 특별법 제정을 시도하려는 이유가 뭘까? 여권이 특검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에 대해 <경향신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상처를 입을 경우 악화될 호남 민심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여권이 대북 송금 특검을 수용한 후 호남에서의 지지율이 곤두박질 쳤던 선례를 상기해보면 납득할만한 진단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걸 다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

의아한 점은 이것이다. 여권이 특별법을 근거로 민간기구를 꾸려 도청 테이프 내용을 공개한다고 해서 호남 민심이 악화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

안기부 불법 도청팀인 ‘미림’의 도청 대상이 당시 여권 인사들 뿐 아니라 야권 인사들, 즉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까지 망라돼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미림팀이 97년 대선 당시 DJP연합 합의과정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도청 테이프 내용이 공개될 경우 불똥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튈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참여정부 입장에서는 특별법이든 특검이든 어차피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굳이 특검이 아니라 특별법을 주장하는 이유가 뭘까? 여기서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여권의 병행전략이다. 여권은 불법 도청 경위는 검찰 수사에, 도청 테이프 공개는 민간기구에 맡기는 병행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런 병행전략이 실효를 거둘 경우 여권은 ‘최악’의 상황 대신 ‘차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검찰과 특검은 모두 사법처리를 전제로 수사를 하는 곳이다. 현행 법률 체계상 검찰이든 특검이든 불법행위를 위주로 수사를 해서 발표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불법 도청 경위와 도청 테이프 유출 경위가 수사의 주 대상이 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청 테이프 유출 경위에 수사 초점이 맞춰질 경우 수사는 자연스레 유출 동기와 수거과정, 이후의 사후 처리과정으로 향하게 된다. 수사 시스템 상 국민의 정부를 정면으로 겨누는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권으로선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런 상황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상쇄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도청 테이프 공개는 아주 유효한 방법이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뒷모습’이 공개되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 즉 문민정부 시절 여권 인사들의 ‘뒷모습’까지 함께 공개한다면 여론은 분산된다. 질타의 대상이 특정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권 전반이 됨으로써 특정 지역에서 반감이 도드라지는 양상을 막을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분석은 ‘정치공학’ 측면만을 염두에 두고 행한 것이다. 남는 문제가 있다. 여권이 정치적 계산을 했건 말건 국민 여론은 별개의 차원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국민 여론을 살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한겨레신문>의 보도다. <한겨레신문>이 전국의 성인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지난 1일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74개 도청 테이프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61.1%로 나왔다. 또 수사 주체에 대해서는 ‘검찰이 아닌 다른 기관’이 해야 한다는 응답이 63.5%였고, 이렇게 응답한 사람의 41.1%는 ‘새로 만드는 중립적 민간기구’를 그 대안으로 꼽았다.

<한겨레신문>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권이 추진하려는 특별법 제정이 국민 여론을 등진 채 정략적 차원에서 모색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국민 여론에 정치적 계산을 얹은 접근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섣부르게 단정할 수는 없다. <한겨레신문>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도청 테이프를 공개해야 한다는 응답률이 동질인 것은 아니다. 공개 범위에 대해 52.9%는 ‘범죄 혐의가 있는 대목만 공개’해야 한다고 답했고, 43.3%는 ‘모든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전자는 특검제, 후자는 특별법을 지지하는 여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수치다.

하지만 명료하지가 않다. 이 여론조사로는 ‘범죄 혐의가 있는 대목’이 공소시효가 지난 범죄행위까지를 포괄하는 것인지, 또 ‘모든 내용’이 사생활까지를 포함하는지를 알 수 없다. 사생활 공개 문제는 별 이견 없이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공소시효가 지난 범죄행위 공개문제는 수사 대 조사, 검찰・특검 대 민간기구를 가르는 주요 판단잣대다. 처리 방법을 가르는 가장 민감한 부분이 명료하지 않다.

그렇기에 특검제 대 특별법 공방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여론도 변화할 것이다. 아직 유동국면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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