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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걸아!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고? 이제 곧 너도 사춘기를 맞겠구나. 네가 마음이 너무 여려 혹시 상처 받을까 아빠는 벌써부터 걱정이란다.
잉걸아!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고? 이제 곧 너도 사춘기를 맞겠구나. 네가 마음이 너무 여려 혹시 상처 받을까 아빠는 벌써부터 걱정이란다. ⓒ 이동환
누구나 첫사랑이 있다. 그저 그런 유행가일수록 '잊지 못할 첫사랑' 어쩌고 짓까불지만 사실 대개는 잊고 산다. 잉걸아빠도 마찬가지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추억, 그 무른 세월 시간 속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부터 나온다. 과연 첫사랑이었을까?

그래도 첫사랑은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웠노라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 말고 친구 말고 이성을 향한 처음 느낌, 그 서늘하게 다가오던 이상한 감정에 화들짝 놀라며 애태웠던 시간들. 사실은 그 시간들이 아름다운 것이다.

잉걸이 녀석,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나보다. 엄마랑 둘이 속닥속닥 주고받는 얘기가 귓불을 간질인다. 참견하고 싶지만 모자지간에 모처럼 소보록하게 나누는 비밀얘기에 끼어들기가 그렇다. 더구나 내가 아직 자고 있는 줄 아는데 인기척 내기도 미안하다.

잉걸이야 비밀이랍시고 엄마한테만 소곤거렸겠지. 잠자코 기다리면 제 엄마가 아빠한테 죄다 옮길 줄 모르고 말이다. 5학년이나 된 녀석이 맹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니?

열 살짜리 남자애 느낌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1970년. 나는 열 살짜리, 답십리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있는 학교다. 그 해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 학교는 학교대항 연극잔치 준비로 법석이었다. 당시 남산에 있던 제 1라디오 방송국에서 연 대회였다. 방송국까지 가려면 구 대항 예선을 통과해야 했다. 우리 학교 작품은 '나무꾼과 선녀'였다. 선생님이 추천한 학생들이 모여 주인공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런데 4·5·6학년 형들을 모두 제치고 내가 나무꾼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자랑스러웠다. 형들과 당당하게 겨뤄 이겼다는 게 무엇보다도 기뻤다. 아버지는 얼마나 좋으셨으면 골목잔치를 열기까지 했다. 이남 땅에 일가붙이 하나 없는 삼팔따라지로 살아오신 세월이 늘 한이었던 아버지는,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내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무엇이든 일등이어야 한다고, 중간에 멈추면 사내가 아니라고, 내 귓바퀴에 딱지가 흩어져 너덜겅이 될 때까지 이르셨다.

내가 스물여섯 살 때 예순여덟 연세로 돌아가신 아버지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양화면 양화리 하장동이다. 일제 치하에서 북청 사람들은 경성에 와 물장수를 하며 번 돈으로 아들들을 죄다 법대에 보내 판검사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생활력 강하고 자식 교육을 지독하게 시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 부지런함은 김동환이 쓴 시 '북청물장수'에도 나온다. 아버지 역시 몸이 부서져라 일하셨고 덕분에 나는 부족함을 모르고 컸다.

각설하고, 다시 나무꾼과 선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연극 사이사이에 합창이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는데 5·6학년 형 누나들로 이루어진 학교합창단이 맡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 합창단 가운데 유난스레 눈에 띄는 6학년 누나를 발견했다. 긴 생머리와 투명한 피부, 솔직히 그밖에는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문제는 첫눈에 그 누나한테 빠져버렸다는 데 있다. 열 살밖에 안 된 꼬맹이 가슴 속에 그만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그 누나가 떠올랐다. 명치끝이 아팠다. 학교에서 한 번이라도 누나 얼굴을 더 본 날은 행복했다. 연극연습이 없는 날은 학교도 가기 싫었다. 밥맛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다. 도대체 열 살짜리 밤톨만한 게 무엇을 알아서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너무 조숙했던지, 아니면 되바라졌던지, 그도 저도 아니면 싹수가 노랬던가 그랬겠지. 아무튼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누나 둘레를 지나치게 맴돌았던 모양이다. 나는 혼자만 간직한 비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무슨 선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틈만 나면 그걸 들고 누나네 교실 언저리에서 얼쩡대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상심해서 돌아가는데 느닷없이 6학년 형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다짜고짜 화장실 뒤 모래언덕으로 끌고 가더니 뺨부터 한 대 때리는 것이었다.

"너 자꾸 까불래?"
"뭘요?"
"이 자식이 안 되겠네. 얘들아, 밟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맞아봤다. 너무 고통스러워 나도 모르게 "잘못했어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코피를 쏟고 온몸이 모래범벅이 된 뒤에야 형들은 밟기를 멈추었다. 누군가 퉤, 하고 쓰러진 내게 침을 뱉었다.

"자식, 대가리 피도 안 마른 게 누굴 넘봐. 어이, 꼬맹이! 학교에서 좀 유명하다고 까부는 모양인데, 똑똑히 들어. 걘 인마 내 거야. 앞으로 한 번만 더 알짱거리면 죽을 줄 알아!"

대가리 피도 안 마르기는 저나 나나 똑같건만, 아무튼 너무 억울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내가 맞고 들어왔다는 말씀을 어머니한테 듣자마자 내 방으로 들어와 자초지종을 물으셨다. 밸이 잔뜩 꼬였던 나는 어머니 앞에서는 그냥 입을 다물었지만 아버지 앞은 달랐다. 자세한 얘기를 다 듣고 난 아버지는 껄껄, 웃으셨다.

"이 아바이 보기에느 맞을 짓을 했음둥. 빼앗을 자신이레 없으므느 너메 여자를 넘보는 거이 아임메. 알았음?"

3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한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지금, 내 아버지 그 호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이제부터 잉걸이를 위한 몇 마디를 미리 준비해둬야 한다. 상처받고 아파할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사내들 첫사랑이란 늘 실패로 끝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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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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