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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던 시기, 서양인들은 중국 상하이를 '동방의 파리'란 별명을 붙여 불렀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상하이 프랑스 조차지인 형산로(衡山路)에 들어선 프랑스식 건축물과 무성한 프랑스의 상징나무인 오동나무 가로수에서 풍기는 멋이 '정말 파리에 온 듯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차지 형산로는 젊음과 낭만의 거리로 유럽식 바와 카페가 즐비하다.
ⓒ 유창하
과거 100여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상하이 형산로에 가면 프랑스 조차시기에 지어진 프랑스식 건축들이 지금도 큰 변형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록 당시 건물 1층은 외국인과 젊은이를 겨냥하여 조성된 고품격 바, 카페로 탈바꿈되어져 있기는 하지만, 옛 건물의 멋과 고품격 현대식 카페의 조화로운 풍경을 보며 과거와 현재를 유추해보는 것은 재미와 흥미를 돋운다.

2.3 km 형산로, 프랑스 자국민을 보호, 프랑스 페탱 사령관 길

▲ 형산로 '젊음과 낭만의 거리'를 걷고 있는 젊은 여성들
ⓒ 유창하
우선 과거 프랑스의 조차 지역이었던 형산로(衡山路) 거리에 들어서면 오래되고 거무튀튀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젊음 낭만의 거리'를 발견하고 한번 놀란다. 총 2.3km에 달하는 형산로는 도로를 따라 서양 유럽식 스타일의 옛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세련된 야외 파라솔 카페에서 고급식사를 하는 젊은이와 외국인들의 모습에서 상하이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곳 프랑스 조차지 형산로의 탄생 비밀은 '프랑스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에서 출발한다. 영국과 미국의 뒤를 이어 1849년 상하이에 프랑스 조차지를 확정하였으나, 1860년에 서구 제국주의와 부패한 청나라 조정에 대항하는 '태평천국 난'이 발생하자 위협을 느낀 프랑스는 자국민 보호 명분을 내세웠다.

초기 조차지에서 프랑스가 세운 서가회 천주교당까지 도로를 확장하여 군대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형산로 거리이다. 그러다 1922년 이 길을 확장하며 프랑스 1차 세계대전 전쟁 영웅이었던 페탱(Petain) 장군의 이름을 따 베이땅루(貝当路)로 불리었다.

이후 일본군이 상하이에 진군하자 전쟁 여력이 없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1943년 상하이에서 철수하며 조차지를 당시 상하이를 통치하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넘겨주었고 국민당은 베이땅루를 형산로로 개명했다.

▲ 1910년 건축된 서가회천주교당의 수려한 모습이다.
ⓒ 유창하
기독교 문화는 상하이 침탈과 함께 시작 된다

근대사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은 선교사와 함께 '십자가'가 선도한다. 천주교가 상하이에 전파된 경위는 1594년 광동에서 이탈리아 선교사를 만난 상하이 출신이며 명나라 말 시기 서양수학, 서양천문을 깨우치고 과학책을 남긴 과학자 서광계(徐光啓)에 의해서다. 현재 서광계의 묘와 동상도 서가회천주교당 뒤편에 자리 잡고 있어 찾아가 볼 수 있다.

▲ 명나라 때 정치학자였던 서광계의 동상이다.
ⓒ 유창하
1640년에는 서광계의 영향을 받은 서광계 손녀가 상하이 최초의 성당을 지어 기독교 문화를 전래시켜 나갔다.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기에 이르러 중국 남부 일대에 12개의 성당이 지어질 만큼 기독교가 번성하였다가 청나라 중엽부터 말기에는 청나라 조정의 박해로 선교활동이 중지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1844년 천주교 선교사와 선교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와 청나라 간 황푸조약 체결, '청 조정은 성당을 보호해야 한다'는 문구까지 집어넣었다. 이후 프랑스는 1847년 서가회에 아시아 최고의 로마식 성당을 건축하여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17년 형산로에 상하이 '협화당'이라는 이름의 미국교회를 설립하여 기독교를 전파하였으며 이후 이 교회는 중국인, 한국인, 서양인 등 외국인이 모여들자 1923년 국제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 옛집과 손자문의 집

형산로의 샛길인 동평로 9호에 다다르면 현재 상하이음악학교 부속 중학교로 사용 중인 과거 국민당 총통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의 옛집을 볼 수 있다. 잘 정돈된 아름다운 정원과 프랑스식 서양건축물이 우아하게 여러 채 들어서 있는 이곳은 과거 상하이 부호들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중국 개방이후 상하이에서 만나는 중국 부자들의 '뿌리 깊은 역사성'을 여기서도 재발견하게 한다.

▲ 국민당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의 옛집이다.
ⓒ 유창하
그 중 한 채는 송미령 동생인 송자분이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 선물로 준 집이라 한다. 이 집은 장개석과 송미령이 아끼는 집으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내전으로 바쁜 와중에도 7번 정도 머물며 거주하였던 곳이다. 장개석이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해 타이완(臺灣)으로 도망간 이후 중국정부에서 접수하였다.

송미령의 집 옆인 동평로 11호에는 그녀의 동생 송자분의 옛 집이 있다. 이집은 1936년에 지어진 네덜란드 풍의 정원이 있는 고품격 저택으로 그 당시 상하이 '송씨 부자집'의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곳이다.

송자문의 집에서 나와 형산로를 따라 조금 걸어 내려오면 형산로 53호에 국제예배당이 나온다. 이 교회는 그 당시 상하이로 몰려온 조선독립 운동가들 활동과 모임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중국문화혁명시기에는 체육관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국제교회당 건물은 1935년에 건설된 곳으로서 1400여 명이 예배를 볼 수 있는 현대식 기독교 예배당이다. 현재 이 곳에서는 중국어 예배와 영어 예배가 열린다.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영웅, 형산로에서 다시 태어나

다시 형산로를 따라 서가회 방향으로 10여분 걸어 내려오면 형산공원이 있다. 형산공원은 1926년에 완공된 프랑스 조차지의 곳으로 중국인은 들어갈 수 없는 와이탄(外灘)의 황푸공원처럼 외국인 전용 공원이다. 이름 역시 프랑스 페탱 장군의 이름을 따 베이땅공원(貝当公園)으로 불리다 국민당 정부가 1943년 형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 형산공원은 프랑스 조차 당시 중국인은 출입 금지였다.
ⓒ 유창하
프랑스 영웅 페탱(Petain Henri Philippe ; 1856-1951)은 프랑스의 장군이며 정치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1916년 봄의 베르덩 공방전의 성공으로 '베르덩의 영웅'이란 이름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부수상, 독일 점령기엔 수상, 프랑스 해방 이후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종신형으로 생을 마감한, 영웅에서 매국노의 극을 달린 프랑스 근대사 인물이다.

형산공원을 나와 맞은편에 새로 조성한 서가회 공원으로 가면 아시아 최고의 녹음실이 있었던 백대소홍루(百代小紅樓)가 나온다. 1921년 건설된 프랑스식 건물이며 당시 미국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가 돌아가고 있어 프랑스인 등 서양외국인들이 주로 찾는 장소였다. 실내에 들어가면 과거에 사용하던 축음기도 전시되어 있고 실외에는 그 당시 사용했던 녹음실 기계가 전시되어 있어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 서가회 녹지공원 인공호수의 흑고니와 흰고니. 상업지역에 조성한 공원녹지이다.
ⓒ 유창하
인공호수와 잘 꾸며진 산책로, 인공호수 위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흰 백조와 검은 백조들을 뒤로 하고 유행의 상가거리인 서가회 지하철역 지하상가를 지나면 지하철 동북쪽 출구 차오시베이루(漕溪北路) 201호에 위치한 서가회성모당 옛집이 있다. 이곳은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한 1936년에 피난 온 3300여명의 아동이 보호 받기도 하였던 전쟁의 아픈 흔적이 있는 건물이다.

100여 년을 각국 손님 맞이하는 천주교대성당 예수 그리스도

서가회성모당에서 도로 맞은편을 보면 우아하면서 웅장한 모습의 서가회천주교당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서가회 장서건물, 왼쪽에는 서가회 기상대 건물이 보인다. 먼저 지하상가로 내려가 서가회 장서루 건물을 찾았다.

서가회 장서루 건물은 현 우리나라식대로 번역하면 '정부문서보관소'인 셈이다. 1930년도 발행된 중국 최초의 잡지, 고 영문 잡지, 고 신문 유럽 고대 도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영어원본 8만권 중문 12만권). 토요일 오후 2시에 찾아가면 안내원이 내부를 구경할 수 있도록 특별히 안내한다.

당시 동양 최고의 성당이었던 서가회 천주교당은 1896년 설계하고 구 로마식성당을 헐고 재건축 시작 후 6년만인 1910년 완공한 5층 건물높이의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프랑스식 고 건축물로 현재도 유럽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명소에 속한다.

▲ 서가회천주교당의 예수상.
ⓒ 유창하
성당의 외관 중앙에 두 팔을 쫙 편 예수상은 100여 년 동안 이 성당을 찾은 '각 국적 사람들의 음모와 회환과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상하이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조차지 중 특히 프랑스 조차지는 프랑스인뿐만이 아니라 영국인, 미국인, 백러시아인, 중국인 등이 많이 거주하였다.

이들은 각국에서 여러 이유로 들어온 외국인들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도망 나온 짜르 왕조정권 지배층인 2만5천명의 백러시아인, 각종 범죄조직과 매춘조직에 관련된 외국인이 있었고, 일제의 식민지통치 강압기에 조선에서 넘어온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고, 많은 중국 혁명가들이 있었다. 이들 외국인들의 은신처요 활동 무대였다.

▲ 서가회천주교당의 웅장한 실내 모습
ⓒ 유창하
성당에 들어서니(토, 일요일 오후 1시 이후 일반인에게 개방)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신자들보단 성당을 관람하는 관광객들이 더 많았다. 성당안내원은 서광계와 천주교 선교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유화그림과 벽에 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설명한다. 토요일의 천주교당은 성당을 찾은 내방객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돋보인다.

유럽의 대성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당시 아시아 최대성당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수려한 장식의 성당 외관과 높은 천정으로 웅장하게 장식된 내부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100여 년 전 신도들이 가득 찬 채 예배를 보는 프랑스인과 중국인들의 모습'이 떠올라 숙연해지기도 한다.

천주교 성당 왼쪽 편에는 1870년 건립된 국제천문대가 있다. 서가회 천문대는 그 당시 아시아 최대의 천문대로 영국천문대에 아시아 기후를 관측하고 보고할 정도로 기술과 인력이 뛰어났던 과학기지였다.

젊음과 낭만, 전쟁과 혁명의 세계

상하이 형산로 3.2 Km를 따라가는 프랑스 조차지 답사는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영웅 페탱장군이 만들었던 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형산로의 영웅이던 페탱장군은 매국노로 전락하여 쓸쓸한 생을 마감하였으나, 100여 년이 지난 상하이 형산로가 세계 각국 젊은이들이 찾는 '프랑스 옛 건물과 아우러지는 젊음과 낭만의 거리'로 부활하고 상하이를 알리는 명소가 되어가고 있음은 100년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 러시아혁명으로 도망쳐온 백러시아인이 세운 러시아 문호 푸시킨 동상이다.
ⓒ 유창하
생명 부지를 위해 매춘의 나락으로 전락한 제정 러시아 귀족 출신의 여성이 생겨난 거리였고(도망 나온 백러시아인들은 상하이의 볼세비키 대사관 침공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중국인들이 피난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부 창출을 위해 모여든 유럽 탐험가들의 거리였고, 아편과 폭력이 난무했던 거리인 동시에 정치 혁명가들의 활동무대였던 곳이 프랑스 조차지 형산로 거리이다.

이처럼 형산로는 세계강국들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거리이다. '전쟁과 혁명의 세계사'가 그다지 넓지도 않은 이곳 옛 프랑스 조차지에서 일어난 것이다.

현재 옛 프랑스 조차지인 형산로 거리에는 밤이 되면 각국에서 온 청년들과 사업가들이 모여들어 고급 바와 카페의 불을 밝히고 있다. 그들 속에는 한국 젊은이들도 섞여 있다.

덧붙이는 글 | 유창하 기자는 다음카페 "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 http://cafe.daum.net/shanghaivillage 운영자이다. 중국 상하이의 문화 사회 등을 알리며 중국 내 한국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전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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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간 오마이뉴스에서 쉬었네요. 힘겨운 혼돈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새로운 기사로 독자들께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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