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이자 옥과미술관 관장인 일목(一木) 최준호(崔峻豪)씨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와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의 유묵을 탈초하고 해제한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한얼미디어 刊)를 출간하였다.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 중국에까지 필명을 떨쳤던 창암 이삼만. 이 두 명필은 내로라 하는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유배와 가난으로 점철된 고난의 생을 살아갔다. 그러나 서(書)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난세를 견디게 한 마지막 길이었고, 생을 바쳐 그 길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글씨’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준 대가로서의 족적을 남겼다.
두 명필이 한 권에 함께 글씨를 남긴 이 희귀한 유묵첩을 최준호 관장이 탈초하고 해제하여 출간하였다. 대가의 유묵을 탈초, 해제한 책이 드문 시점에서 나온 이 책은 원교와 창암의 예술세계에 심취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한국서예사에 두 분이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 이번 저서는 심도 깊은 인문학적 향기를 내포한 서예 출판이 드문 시대에 두 명필을 현재로 불러내어 그 진면목을 보여준 의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원교창암유묵>은 어떤 서첩입니까?
"이 서첩은 아산 조방원 선생께서 40년 동안 소장해온 것으로, 접어 놓았을 때 가로 31.3cm, 세로 42.6cm, 두께 3cm, 무게 2.7kg이며, 표지를 제외하고 앞뒷면을 합쳐 58면의 병풍식 서첩으로, 펼치면 940cm에 이릅니다. 원교 선생이 앞쪽 30면에 걸쳐 112자를 썼고, 그 뒤를 이어 28쪽에 걸쳐 창암 선생이 발문을 포함 110자를 썼습니다. 원교 선생이 먼저 쓰고, 비워져 있는 부분을 창암 선생이 채워 넣은 것입니다.
두 대가 모두 독특한 필법과 장법으로 물 흐르듯 이 서첩을 채우고 있습니다. 또한 창암 선생은 서첩을 사이에 두고 원교 선생을 ‘흠모’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듯이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교와 창암 글씨의 장법, 구성, 흐름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흠모하는 마음, 곧 원교 선생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이 서첩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원교창암유묵>이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로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 서첩은 아산 선생이 1960년대 구입하여 보관해오던 것인데, 1992년경부터 가끔씩 선생께 들르면 특별히 아끼면서 보여주셨습니다. 구한 내력을 말씀하시면서 '보면 볼수록 의미가 담겨져 있는 서첩'이라고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7, 8년 전 아산 선생께서 '완상과 농첩의 즐거움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고, 그래서 지난해 말 영인본 제작을 구체적으로 진행해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 첩의 내용은 탈초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복사본을 가지고 탈초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시작했는데, 탈초만 7개월이 걸렸으니 탈초 과정이 지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2쪽의 ‘貼(첩)’의 경우는 막판 인쇄 과정에서 인쇄기를 세워놓고 바로잡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貼’자는 창암 선생의 고급한 한자 구사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한데, 우리는 흔히 ‘帖(첩)’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두 의미는 미세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즉, ‘帖’은 ‘묶어 놓은 책’의 뜻으로 얇게 붙인 경우에 씁니다. 반면 ‘貼’은 ‘어디에 붙여 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암 선생의 마지막 의도를 놓치고 지나갈 뻔 한 것이죠.
그러다가 탈초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해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해제 과정에서 원교와 창암의 ‘서결’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의 서결을 보면서 주요 골자가 서결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서결'은 단락이 지어져 있는데, 단락의 근원은 어디인가를 찾기 시작하였고, '서결'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혹 이 서첩을 통하여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없는가 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단행본 출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 탈초, 해제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원교, 창암 초서의 필획이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서체가 많았습니다. 한편 문구가 원문과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서첩의 가장 앞에 원교 선생이 쓴 ‘口諷牛毛 心麟通角’은 종밀(宗密, 780~841) 선사의 <금강반야경소론찬요(金剛般若經疎論纂要)>에 나오는 문구로, 원문에는 ‘麟(린)’과 ‘通(통)’의 위치가 바뀌어 있습니다. 의문이 생겨 서첩을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혹 후대 사람이 서첩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순서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서첩의 연결 상태는 처음 만들어진 그대로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원교 선생은 ‘麟(린)’과 ‘通(통)’을 바꿔 썼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 착각을 하였을 수도 있고, 혹 알면서도 그렇게 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달한 것이 바로 ‘농묵(弄墨)’이었습니다. 서첩 전체가 갖는 분위기는 ‘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은 ‘가지고 놀다’라는 뜻이지만, 그 안에는 옛 선비들의 단아한 아취가 담겨 있습니다. 선비들은 먹과 벼루를 가지고 ‘농’했고, 인장을 가지고 ‘농’했습니다. 따라서 틀리게 썼다고 해서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정립하는 데 가장 어려웠습니다.
원교 선생의 글씨 특징 중 하나가 신장(伸張), 즉 ‘길게 늘임’인데, 56쪽의 도판에 나오는 ‘連’자는 일반적인 초서는 첫 시작 획 길이가 비교적 짧은데, 원교 선생은 첫 시작 획을 유난히 길게 신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서예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대목이어서 두 사람의 필체를 알지 못하면 쉽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 이 유묵첩을 탈초, 해제하면서 원교, 창암, 그리고 아산 선생이 투사되고 중첩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처음에는 확대 복사본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 원본을 가져다 두 달 정도 완상(玩賞), 농첩(弄帖)을 하였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원본을 볼 때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교 선생은 스스로 ‘농’을 하였고, 창암 선생은 원교 선생의 글씨를 많이 구해보았다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서첩을 구한 후 계속 완상하면서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결국 서가로서의 예술정신, 창작의욕을 일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산 선생 역시 ‘완상과 농첩’하였을 것입니다. 원본과 동일한 형태의 영인본을 만들려고 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라 하겠습니다."
- 원교 이광사는 옥동 이서에서 출발하여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를 완성하였으며, 진·초·예·전서에 모두 능했고,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이루었습니다. 창암 이삼만은 중국에까지 그 필명을 떨쳤고, 독창적인 서풍으로 고유색을 내함한 그만의 독특한 ‘창암체’를 완성한 명필로 유명합니다. 이 서첩에서 드러나는 두 분 서체의 특징을 말씀해 주십시오
"원교 선생의 글씨는 자획이 건강하고 웅장하며, 기상이 빼어나면서 그러한 가운데 유려함이 돋보입니다. 단아하면서도 교(巧)합니다. 장법 구성에 있어서 다른 서가와 달리 신장해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초·예·전서에 모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산수·인물·초충 등에서도 뛰어났습니다.
창암 선생은 유려하면서 신들린 듯한 운필을 보여줍니다. 갈필(葛筆),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 개발 등 민중적인 필기구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혈주어지면(氣血注於紙面)’, 즉 기와 혈이 운필하는 대상인 지면 위에 천연스럽게 스미고 완전히 배어 들어가 합일되도록 운필하였습니다. 두 분의 글씨에는 교(巧)와 졸(拙)이 각각 나타나기도 하고, 또 교와 졸함이 함께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서첩에는 이러한 두 부분이 다 내함되어 있습니다. 두 분의 글씨를 한 마디로 말하면 “佰喈 骨氣洞達 元常 絶倫多奇(백개는 골기가 막힘없이 통하고, 원상은 기이함이 비길 데가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암 선생이 쓴 '서결'에 나오는 이 문구는 백개(채옹)와 원상(종요)의 글씨를 말하는 것이지만, 두 분을 얘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원교 이광사와 창암 이삼만은 ‘한국 서예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활동했던 대가입니다. 추사 김정희에 비해 두 분의 예술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서예사에서 두 분이 차지하는 위상과 가치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수집가, 호사가, 감상가들이 추사 선생의 글씨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원교는 동국진체 완성자로 원교체를 이루었고, 창암은 창암체를 이룬 자주적인 글씨체를 완성한 서가입니다. 추사 선생에 비해 두 분은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극히 자주적이고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였습니다. 두 분이 있었기에 추사 선생이 한국서예를 더욱 크게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원교, 창암 두 선생은 각기 '서결(書訣)'을 저술함으로써 서예이론 정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한국서예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만 유학 중 왕베이위에(王北岳) 교수에게서 전각을 배웠고, 관련 논문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한국화가로서는 드문 예인데,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었는지요?
"평소 한국화를 하기 위해서는 한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입학 후 전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전각 수업을 들었습니다. 전각은 전각 외에도 문자학, 금석학, 한문학, 고고학 등을 광범위하게 공부해야 포괄할 수 있는 예술이었습니다. 3년간 왕베이위에 교수에게서 배우면서 전각에 심취하여 500여 과 정도를 새겼습니다. 대만, 중국의 경우 시·서·화에 두루 능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에 대한 기초적인 학문연구가 필요합니다.
-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되었고, 인문분야 저서의 매출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출간 후 주위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인문학의 위기이기도 하겠지만, 기초학문의 위기라고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주변 분들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듣기도 하였으나, 학문적 오류나 잘못된 부분이 없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책이 지닌 의미라면 탈초, 해제집이 보기 어려운 시점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최준호씨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국립 대만사범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대만 유학중 왕베이위에(王北岳) 교수에게 전각을 배웠고, 지금까지 세 차례의 한국화 개인전을 열었다. 저서로 『齊白石篆刻藝術的硏究』(臺北, 文史哲出版社, 중문판, 1992)이 있으며, 「黃公望 富春山居圖의 진위문제」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현재 옥과미술관 관장,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재단법인 아산미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월간 서예문인화>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