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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앉은 그 분과 새들이
마주앉은 그 분과 새들이 ⓒ 전희식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고서야 도달한 결론이 별 볼일 없는 수가 있듯이 별 생각 없이 직감에 따라 정한 어떤 결정이 불씨가 되어 모든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릴 때가 있다.

올해 마흔 일곱 번째 맞는 내 생일날이 그랬다.

생일날이라고 해서 특별한 다짐을 하거나 일정을 잡지도 않았었다. 이게 내게는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내 생일날 한 친구가 100일 기도를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뜬금없이 나는 애꿎은 내 머리통을 밀어 버렸다. 똥장군 지고 밭에 나가다가 남 따라 장에 가는 꼴이었다. 머리를 밀어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100일 기도 시작하는 친구 때문만은 아니다. 내 생일날 불쑥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있었다.

전주 덕진공원에 갔다. 잎이 더 덕스러워 보였다.
전주 덕진공원에 갔다. 잎이 더 덕스러워 보였다. ⓒ 전희식
무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는 시골 요가원에 들어가 단식정진을 하고 있는 선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이. 전 선생 소고기 닷 근 하고 돼지고기 너 근만 사 오시게. 구경이라도 좀 하자."

뭔가 특별해지고 싶은 생일 같은 날에 100일 기도 하는 사람과 단식정진 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누군들 벨이 꼴리지 않고 배기겠는가? 나는 욕실에서 얼굴을 씻다가 이마 위로 올라가다 머리칼에 걸려버린 양손을 거두고는 바리캉을 집어 들고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것이다.

내게는 머리를 미는 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귀농하고서 내내 머리를 밀다가 최근 3개월여 동안 꼭 두 번 이발소에 갔었던 머리였다. 이발소를 찾아 나서던 발길을 다시 되돌린데 불과하다.

그 분과 새들이는 머리를 맞대고 즐거웠다.
그 분과 새들이는 머리를 맞대고 즐거웠다. ⓒ 전희식
머리를 기르고자 한 것도 따지고 보면 터무니없다. 어디를 방문하려고 하는데 대뜸 상대방이 <복장불량, 두발불량>을 이유로 내 방문을 거절하기에 홧김에 머리를 기르고자 했었다. 사시사철 입던 생활한복도 벗고 반바지와 티를 입기도 했었다. 실없는 짓이었다.

머리를 밀고 나니 갑자기 요가원 선배가 보고 싶어졌다. 새들이를 데리고 텐트랑 배낭이랑 코펠, 라면까지 트럭에 싣고 고산면 양아리에 있는 요가원으로 갔다.

여기서 나는 심상치 않는 분을 만났고 굳은 인연을 맺었다.

이 분은 새들이부터 알아봤다. 대뜸 건물 옥상으로 새들이를 데리고 가기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따라가 봤더니 새들이를 가부좌 시켜놓고 뭘 그렇게 진지하게 얘기를 하는지 새들이가 특유의 빠져든 표정으로 귀 기울이고 있었다.

연꽃이다.
연꽃이다. ⓒ 전희식
하룻밤 지나고 나는 그 분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세 가지 맹세를 해야만 그분과의 인연을 정식으로 맺게 되어 있었다. 한 시간여의 간단하지 않은 확인과정을 거쳤다. 그리고는 세 가지의 맹세에 들어갔다.

첫째, 저는 누구에게나 어떤 방식으로든 의식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둘째, 저는 성심을 다해 다른 이들을 돕고 봉사하겠습니다.
셋째, (비밀로 하기로 했음.)


이었다. 이 분은 경제학자이면서 철학자였고 또한 요기였다. 이 분과 맺은 인연은 단지 한 사람과의 인연으로 그칠 것 같지 않다. 전날 밤 이분을 비롯하여 내 선배랑 같이 나눈 깊은 얘기가 연결되어 있다.

대안의 시대문명을 이끌어가기 위한 자질과 소양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했었다.

요가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넓디넓은 덕진공원의 연꽃 핀 연못을 다 돌면서 여러 모양의 연꽃을 찍었다.
요가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넓디넓은 덕진공원의 연꽃 핀 연못을 다 돌면서 여러 모양의 연꽃을 찍었다. ⓒ 전희식
이 분과 나는 날카로운 시대정신을 갖춘 지성을 우선으로 꼽았다. 그 다음이 영성 수련이었다. 물질세계와 제도를 넘어서는 명상수련이 두 번째로 꼽혔던 것이고 세 번째가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었다. 내 선배는 높은 도덕성을 곁들였다. 또 하나 덧붙여진 것이 흙에 손과 발을 담고 사는 생태적인 생활이었다. 스스로 몸이 최소한의 자급을 이루며 생태적으로 살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라는 데에 뜻을 같이 했다.

하나만 더 더하자고 하여 추가된 것은 '웹 마인드와 기초적인 웹 기술'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분을 내 고물트럭에 모시고 전주역까지 모셔다 주게 되었다. 중간쯤에서 내 고물 트럭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뿌연 김을 내 뿜으면서 서 버렸다. 냉각수가 말라버린 것이다. 트럭을 길가에 세우고 라디에이터를 열고 페트병으로 네 번이나 물을 퍼다 넣으면서 이 분이 보여 준 모습은 감탄스러웠다.

침착하고 순서 있는 그분의 처신은 차분하다 못해 거룩했다. 불볕더위 속에서 차가운 이성이 빛나는 이런 모습은 내 생애에 꼭 한번 밖에 본적이 없다. 8년여 전 어느 후배가 그랬었다. 예기치 않은 위기 속에서 무섭도록 침착한 그 후배의 모습을 나는 늘 서늘하게 기억하곤 했다. 그 분이 보여준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항상 어느 때건 주변을 돕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시었다.

준비 없이 맞이한 생일날에 무턱대고 밀었던 머리 덕에 받은 커다란 생일선물 같은 분이셨다. 우리는 다음에 만날 약속을 아주 구체적으로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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