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을 맞이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집회가 10일 정오 전세계 10개국 각지에서 동시에 열렸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10일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연대의 날'로 정하고 세계 각국의 시민단체들과 연계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정의를!'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동시에 집회를 열었다.
도쿄, 교토, 뉴욕, LA 등 10개국 30여개 도시 일본 대사관이나 영사관 앞에 집회자들이 모여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부산, 수원, 전주, 울산, 춘천, 광주 등 8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서울에서는 정대협 주최로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됐다.
제669차 수요시위이기도 했던 이날 행사에는 방송인 김미화(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홍보대사)씨,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박인숙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과 전국에서 모인 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일본 오키나와에서 온 평화회 학생 등 500여명이 참여했다.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가 없다면 배상도 필요 없다"
신혜수 정대협 공동대표는 "오늘 집회는 14년간 매주 수요정기시위를 끈질기게 해 온 위안부 피해자들과 정대협의 운동에 전세계가 지지를 보여 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라며 "전쟁 속에서 고통을 겪어 온 피해자들과 진정으로 해방된 세상을 향해 나가기 위해 모였다"고 이날 모임을 설명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범죄와 모든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와 법적 배상, 올바른 역사교육, 추모관 건립을 추진하고 ▲ 유엔과 ILO(국제노동기구)는 일본 정부가 권고를 받아들이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다하며 ▲ 세계 시민사회는 전쟁과 여성 폭력이 없어질 때까지 끝까지 연대할 것을 촉구했다. 또 "전범국인 일본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될 자격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집회에 참가한 16명의 피해 할머니들을 대표해 발언한 이옥선 할머니는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은 우리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며 "115명으로 등록되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죽더라도 젊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본에게 책임을 요구해 달라"고 말했다.
황금주 할머니는 "사립학교 4학년 졸업을 25일 앞두고 길거리에서 끌려가서 청춘을 바쳤다. 아직도 새벽 1시 넘어서 TV가 끝날 때까지도 잠이 안 오는 날이 많다"며 "일본 정부의 사과가 없다면 물질적인 배상은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강 할머니는 "몸이 아파도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같은 피해자가 없길 바랐기 때문"이라며 "일본이 반성해서 앞으로는 이런 집회를 안하게 됐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끝을 흐렸다.
신혜수·윤순녀 정대협 공동대표는 세계의 날을 선포하며 "전쟁 범죄 중에 가장 치밀한 범죄가 바로 여성들을 성적 노예로 착취해 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서명 운동으로 전세계 여론을 만들어 가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광복 60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며 "할머니들도 이젠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서 집회에 참가하는 만큼 일본 정부도 평화와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주문했다.
세계적인 참여 열기로 집회 현장은 후끈
윤미향 정대협 사무총장은 "교포사회와 여성단체 중심이었던 기존 집회와는 다르게 광범위한 세계 시민단체가 참여한 것을 기쁘게 여긴다"며 "전쟁 범죄 규탄이 세계 중심의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집회에서는 도쿄와 런던에서 온 연대 메시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정신대할머니들과 함께하는 모임의 곽동협 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수요정기집회를 모델로 해서 집회가 열리고 있고, 네덜란드 헤이그 같은 경우 매일 대사관 앞에서 전쟁범죄 규탄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NHK, 로이터 통신 등 각국 취재진 50여명이 몰려 이날 집회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케이블 방송 차이나TV 기자 찌오 퀴안씨는 "중국에서 반일시위가 많이 일어나는 등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며 "한국 위안부 문제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왔다"고 취재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집회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정대협은 집회 전날까지 적어도 60여명 정도의 일본인이 참여 의사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오키나와에서 온 평화회 회원 28명은 전쟁을 반성하는 마음을 계승해야 한다는 내용의 <계승하는 자들>이라는 노래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바쳤다. 몇몇 학생은 할머니들의 손을 붙잡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중학교 교직원인 요시오카 노리코(46, 일본 오사카)씨는 1997년 한국을 처음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게된 후로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수요정기집회에 참가한다고 밝혔다. 노리코씨는 "일본인들이 이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어 창피하다"며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하며 한국인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한국으로 유학 온 대학생 우에노 사토시(23)씨는 대학교 다니면서 한일관계 관련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과거를 보지 않으면 미래로 없다"는 생각에 이번 집회도 참가했다고 밝혔다. 사토시씨는 "후소샤 교과서 등의 교재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마음에 한국과 한국인을 차별하는 생각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최근 일본 내에서 과거를 제대로 알자는 움직임이 작게 일어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희망의 꽃밭을 만듭시다"
이날 집회는 '희망의 꽃밭 만들기' 행사로 오후 2시경 막을 내렸다. 올해 상반기 집회에서 나눠준 꽃씨를 받은 시민들이 집에서 꽃을 피워 가져와 대형 화분 3개에 옮겨 심은 것. 꽃을 심는 할머니들을 보며 강혜정 정대협 국제협력위원장은 "할머니들 마음에 사랑과 희망의 꽃이 피었으면 좋겠고, 온 세계가 이 꽃처럼 희망의 싹을 틔웠으면 한다"고 밝혔다.
정대협은 지난 1월부터 국제 시민체와 연계해 진행한 국제연대 서명운동에 56만여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정대협은 앞으로 "일본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전쟁범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