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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6·25 때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3개월만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평생을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문으로 귀까지 먹었습니다. 온 몸이 망가져서 농사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아끼던 재봉틀마저 팔아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모진 고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80평생을 가난과 싸웠습니다. 불구의 남편과 일곱 자식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17세에 시집 와서 18세에 흥남에 갔습니다. 20세에 시댁으로 돌아왔습니다. 30살의 꽃다운 나이에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전국 방방곡곡 장삿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이랬습니다.
저는 이쯤해서 녹음기를 껐습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어머니의 옆모습을 찍었습니다. 저는 차마 어머니의 앞모습을 찍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눈먼 모습이 너무도 아프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보며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흥남에 찾아가라면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다닥다닥 붙은 사택이 눈에 선해. 흥남 사람들, 참 친절했어. 대부분 죽었을 거야. 바다도 참 맑았어. 그런데 가면 뭐해? 눈이 멀어 볼 수가 없는데."
저는 목이 메어옴을 애써 참았습니다. 해방과 민족전쟁, 그 한가운데에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1978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 아버지와 흥남에서 살 때였어."
덧붙이는 글 | <우리가족과 8.15> 응모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