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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6공의 황태자로 통했던 박철언씨가 회고록에서 풀어놓은 ‘과거사’는 충격적이다. ‘막후 정치’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90년 3당 합당을 전후해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40억원이 건네졌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86년 친위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대법원장 후보라는 사람들이 일개 청와대 비서관 앞에서 면접시험을 보면서 “대임이 주어지면 판사들이 정부에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는 등의 증언은 충격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문제들은 거론하지 않겠다. 굵직한 증언들에 묻혀버린 한 소소한 ‘만남’에만 시선을 맞추려 한다.

‘만남’의 주역은 박철언씨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다. 90년 3당 합당 직전이었다고 하니 ‘만남’의 시점은 89년 말쯤이었을 것이다. 이 ‘만남’에서 신격호 회장은 박철언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김영삼씨가 수상, 김종필씨가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에서 해야 한다.”

이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서 오간 말들이 무엇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X파일을 통해 공개된 삼성의 행태와 닮아있다.

삼성은 97년 대선 때 여야 후보를 넘나들면서 대권의 향배를 저울질했고, 그 저울질 결과에 따라 ‘보험료’ 액수를 조절했다. 신격호 롯데 회장은 정치 책사로서 권력 나눠먹기 방안을 조언했다.

정경분리 원칙을 스스로 깨고, 번지수가 다른 곳에 발을 담근 뒤 흙탕물을 튀겼다는 점에서 두 사안의 성격은 같다.

이쯤 되니 떠오르는 사안이 하나 더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3일, 97년 대선 때 미림팀이 DJP연합 정보를 알아내 당시 여권에 넘겨준 적이 있다는 한 미림팀원의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한 원로 언론인이 막바지 진통을 겪던 DJP공조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집권하려면 무조건 JP를 끌어들여야 한다. 공조안부터 받아들이고 보라”고 조언했으며 “DJ가 대통령에 오른 뒤 이 원로 언론인은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공로로 ‘특정’ 자리에 대한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는 게 미림팀원의 증언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정경분리 원칙을 깼고, 이 원로 언론인은 언론인의 금도인 ‘불가근 불가원’ 원칙을 스스로 깼다.

김영삼 전 대통령(자료사진)
김영삼 전 대통령(자료사진) ⓒ 이종호
물론 신격호 회장이나 원로 언론인의 행위에서 불법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X파일에서 공개된 삼성의 행적과는 달리 두 사람의 행적에서는 실정법을 어긴 정황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행적을 국민이면 응당 누려야 하는 정치활동의 자유를 구가한 것쯤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형식적 법 논리를 내세워 두 사람의 행적에 면죄부를 주기에는 그것이 함의하는 바가 너무 크다.

각각 재계와 언론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막후에서 특정 정치인의 책사 내지 고문 역할을 했다는 증언은 정-재-언 카르텔이 어떤 인맥을 통해 작동되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유력한 실마리다. 정-재-언 카르텔을 구성하는 인물이 특정인 몇몇으로 제한된 게 아니라는 강력한 방증이며, 정-재-언 카르텔이 “음지에서 일하며 권력을 지향”하는 속성을 밝혀낼 수 있는 좋은 단서다.

따라서 두 사람의 행적은 X파일 공개 이후 제기된 “이참에 털고 가자”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손색이 없다.

남은 문제는 규명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나 원로 언론인의 행적은 특정인의 일방적 증언에서만 등장한다. 그렇기에 검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규명이 쉽지 않다. 당사자들은 부인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고백이 아니라 규명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그 길은 막혀있다. 정-재-언 카르텔을 구성하는 또 다른 인물들의 행적이 274개의 도청 테이프에 담겨있지만 여전히 검찰청 창고에서 먼지를 쓰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어제 특검법을 손질하자고 말했다. 도청 테이프 내용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한 특검법 조항은 위헌 소지가 있으니까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참에 “이참에 털고 가자”고 말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이참에 덮고 가자”고 말하고 있다. 이게 작금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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