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우린 '지천에 깔렸다'라고 표현한다. 주로 풀과 나무, 들꽃 등을 말할 때 쓰이는데 요즘은 그것도 옛말이 된 지 오래인 듯하다. 노루귀니 초롱꽃이니 담낭화니 처녀치마니 매발톱이니 하는 꽃들은 귀한 야생화로 분류되어 화분 속에서 곱게 길러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많은 잡초와 들풀, 들꽃들이 사람들의 발끝에 제 몸을 채여도 굳건히 그 뿌리를 내리고 산다. 자연은 그런 것이다. 강인함과 당당함 거기에 의연함까지 보여준다. '등경'의 정원일(46)씨는 그런 자연을 닮고 싶어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산 아래에 '등경'이라는 작은 간판을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천연염색과 규방공예를 업으로 한다지만 사는 눈치를 보면 물질만능의 경제개념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하다. 멀리서 보기에는 저택(?) 같은 분위기의 집인데 가까이에서 보면 뭔가 다르다.
그 궁금증은 정씨의 말을 통해 금방 풀렸는데 집 전체를 폐자재로 만들었단다. 나무는 주로 건설현장에서 버린 폐 판지를 이용했고 창문은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뜯겨져 나온 새시(sash, 일명 샷시)를 이용했다.
집을 짓는 것도 물론 자신의 손으로 하나씩 만들어갔으니 대단하다. 1년 3개월 만에 완성된 집은 평당 기백만 원 한다는 집들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구조도 주인 맘대로 해놔서 편리하게 보였겠지만 무엇보다도 못 하나 하나에 정성 들인 맘까지 합하니 집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부분 같다.
정씨가 천연염색을 한 것은 5년 정도. 그다지 많은 세월은 아니지만 운명처럼 경주에 정착하고 황토옷에 반해 시작했다. 부인 박미영(43)씨와 함께 경주 내남면에서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업이 된 것이다.
그가 굳이 황토와 감옷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매염제 때문이다. 천연염색이 각광을 받으면서 매염제도 자꾸만 화공약품을 쓰게 되는데 알루미늄, 동, 철, 나트륨 등 매염제 원료들은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그는 매염제를 쓰지 않는 황토염색을 고집한다.
황토염색과 함께 바느질도 누이에게 한 시간 정도 수업 받은 것을 제외하곤 모두 독학으로 익혔다는 그는 무엇이든 무조건 해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제는 하루에 딱 네 시간만 염색 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야생화도 기르고 텃밭도 가꾸고 다양한 물건들도 만들고 음악도 들으며 그야말로 자신만의 사람살이를 한다.
물론 거기에서 생산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해 공예대전에 출품했던 대나무를 이용한 만파식적 오디오도 그 기쁨 중 일부다. 야생화도 황토옷 디자인에 접목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니 결국 하루 전체를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셈이다.
'등경'은 올해 동국대학교 관광산업연구소에서 처음 실시한 경주문화체험인증제 업체로 선정됐다. 염색공예와 규방공예를 체험할 수 있는 '등경'은 주로 가족단위 체험단이 많이 찾는데 이불 한 채를 염색하는데 재료비까지 합쳐 3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고, 재료를 가져올 경우는 무료다.
단체의 경우 10명 이상이면 받지 않는데 이유는 인원이 많으면 깊이 있는 체험이 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등경'을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주인 정씨와 꾸준하게 친분관계를 유지한다. 그만큼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등경'이다.
경주의 첫 정착지인 내남면에 있을 때, 지역에서 공방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는 갤러리'를 기획했던 정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전시회를 갖는다. 집 전체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염색은 생활의 한 부분일 뿐 가장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말하는 그는 냉장고와 에어컨을 없애고 화장실도 친환경 재래식 화장실로 만들었다.
물론 체험객을 위한 화장실은 따로 있지만 말이다.
"황토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서인 흙과 짚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자연이지요."
만지면 만질수록 재미있는 것이 흙이고 황토라는 정씨는 '등경'이 그저 천연염색만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의 교류를 통해 그 안에 담겨진 문화의 힘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연스러움의 어울림이 주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소식지 'EXPO 문화사랑 8월호에도 게재됐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