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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아사히(朝日)신문>에 실린 사설(1995년 11월 9일)의 요지이다. 미국이 일본을 무력 합병한 상황을 가정해서 쓴 글이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후, 일본에 진주했던 미국 점령군이 만약 조약을 강요해서 일본을 합병하고 미국의 주(재팬주)로 만들었다고 치자. 점령 이후, 일본에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각종 개혁을 단행한 미국이 일본을 합병했다면, 아낌없이 자금과 인재를 투입해 재팬주 주민의 교육과 산업육성 등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교과서도 영어로 되어있고, 배우게 되는 역사도 미국의 역사다. 미국 국기인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미군 병사로서 전쟁에 나서야 됐을 것이다. 자, 여러분은 이럴 때 '미국은 일본에 좋은 일도 했다'며 세계 제일의 대국에 합병된 것에 감사할 것인가? 더구나 다나카(田中)나 스즈키(鈴木)도 스미스나 존슨으로 개명되고, 일본 독립운동에 대한 사정없는 탄압이 가해졌다면 어떠했을까?"


무얼 얘기하려고 했는지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 말살, 신사 참배, 군대 징병과 노무자 징용, 창씨개명, 독립운동 탄압과 학살 등 일제가 자행한 온갖 만행, 그리고 식민지 미화발언이 이 글에 그려져 있다. 만일 일본이 미국에게 그런 꼴을 당했다면, 일본인인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반문이다.

이 글을 읽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열이 받았을 게다. 수모와 치욕을 가장 참을 수 없어 하는 일본인들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사실 이 사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을 향해서 <아사히신문>이 쓴 소리를 날린 것이다.

<아사히신문> 쓴소리 "미국이 일본을 합병했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코앞에 둔 2003년 5월에도 일본 집권여당의 비중 있는 정치가가 한국 대통령은 안중에도 없는 듯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먼저 원했다"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망발을 늘어놓는 실정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태도도 몸으로 보여주는 망언에 다름 아니다.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일본의 망언, 그러면 드디어 올 것이 온 것 마냥, 우리는 그 배경을 분석하고 의도를 비난하며 항의하고, 언론 또한 대서특필로 시끌벅적하다. 망언만 있으면 이에 대응하느라 우리 사회는 거의 기진맥진이다.

그러나 같은 시각, 일본 사회는 산사의 저녁처럼 고요하다. 연못에 떨어진 하나의 돌, 동그라미를 그리며 어지럽게 퍼져나가는 물결, 한 마디 망언이 만들어내는 한·일 양국의 표정은 이처럼 정반대이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대응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 사람의 망언에 수십만, 수백만 한국인들이 기력을 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허공에다 권총 한 방 쏘았는데, 우리는 무려 수개 사단이 움직이는 꼴은 아닌지?

그래서 생각을 해봤다. 마키아벨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늑대의 혼을 빼는 사자의 용맹함도 중요하지만, 함정을 알아차리는 여우의 지략도 그 이상으로 필요하다고.

'이이제이'라는 말처럼 오랑캐를 다루는 데는 오랑캐 만한 것이 없다. 망언을 다스리는 데도 '망동' 만한 것이 없지 않을까 싶다. 일본이 끊임없는 망언으로 우릴 흔들어대면, 우린 예측 불가능한 '망동'으로 일본을 흔들어댈 수밖에 없다.

단지, 상대방이 봤을 때 '망동'일 따름이다. 어떻게 하면 망언을 일삼는 극우파 정치가들에게, 혹은 망언을 철저하게 단속하지 못하는 일본의 정치제도에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이 민감한 부분을 찾아내면 될 터이다.

한마디 망언에 기력빼는 한국, 산사의 저녁처럼 조용한 일본

희망은 주되, 만족은 주지 말라고 했다. 만족을 줘버리면, 그 가치는 눈에 띄게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냉전시대의 한·미·일 삼각동맹이라는 틀에 매여 있었다. 우리만 몰랐을 뿐, 이미 냉전시대에도 미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자본주의 체제 국가 가운데서는 오로지 한국인에게만 사회주의 국가가 '갈 수 없는 나라'로 남아 있었다. 독야청청 혼자만 반공노선을 고수한 셈이다.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군사무기에 이용이 되는 일부 상품을 제외하고는 'Made in USA'나 'Made in Japan'은 사회주의 국가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유독 'Made in Korea'만은 사회주의 국가를 상대하지 않았다. 독야청청 혼자만 자본주의를 사수한 셈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전선에서 사회주의 전선을 독야청청 방어하고 있었다. 남북간에 이건 완전히 피장파장이다. 분단국가라는 현실은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독야청청이었는가? 독야청청이란 세상이 바뀌어도 홀로 절개를 지키겠다는 말이니, 가는 길은 하나요,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기나 하겠는가.

우리의 갈 길이 이처럼 제한되어 있다면,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좁은 입지를 실컷 농락하지 않겠는가? 뛰어야 벼룩이라는 심산도 있을 것이고, 멀리 뛰어야 독 안의 쥐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런 예측을 보기 좋게 부셔버리고, 그리고 누군가가 'No'라고 말한다면, 한·일 관계는 급격하게 요동치리라.

남북의 독야청청 전선, 누구를 위한 절개인가

조선시대 말엽인 1880년 무렵에 중국 청나라의 황준헌은 <조선책략>을 썼다. 조선이 취해야 할 책략을 담은 문서로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방어하는 일이 제1의 과제라는 요지다. 여기서 황준헌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은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맺어지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만이 최고 상책이라고 주장한다.

말이 조선책략이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완전한 중국책략이다. 청나라 입장에서야 바로 자기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러시아가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겠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당분간은 강 건너 산 넘어 있는 나라이다.

러시아를 견제하여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충정은 말이 된다. 그러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책략을 조선을 위한답시고 내놓고 있으니, 얼마나 조선을 우습게 봤으면 그랬겠는가?

이런 <조선책략>에 대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로 맞선 이만손 선생의 반격은 매우 명쾌하다. 중국하고는 이미 수 백 년에 걸쳐서 신의를 맺어오고 있는데 뭘 더 친할 것이 있겠느냐, 미국에 대해서는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인데 새삼 우리 스스로가 끌어들여서 낭패를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게다가 황준헌이 누누이 강조하던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서는, 본래 우리가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던 나라인데 남의 이간질을 듣고 함부로 배척할 수 있겠느냐고 반박한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일본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우리를 침략한 원수들이고, 마음도 우리와 같지 않으며, 또 이들을 방비하고 있지 않다가 다시 한반도로 돌진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에서 바라는 대로 우리 조선이 호락호락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No'라고 외치는 목소리라도 있었으니까 주변 국가들이 우리의 환심을 사려고 덤벼든 게 아닐까 싶다. 주변 강국의 논리를 그냥 삼키는 게 아니라, 차분히 내려다본 것이다. 그랬더니 어떤 목소리를 내면 되는지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일 봉쇄라인이 일본의 급소

일본이 가장 염려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는 한반도-러시아-중국으로 이어지는 대일(對日) 봉쇄라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이 라인을 깨고, 거꾸로 대륙을 포위하는 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했던 것이다.

한반도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요충지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순망치한의 논리처럼이나 주변국 모두에게 한반도는 입술인 셈이고, 우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자기 이빨이 춥게 생겼다.

이것이 일본에게는 가장 민감한 부분일 것이다. 우리가 중국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러시아와 긴밀해지면 긴밀해질수록, 일본은 안달이 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중국과 가까워지고 러시아와 긴밀해지고 싶다는 한 마디만 흘려도, 일본의 외곽을 때리는 형국이 된다. 일본을 흔들어대는 민감한 급소는 바로 이곳일 것이다.

정상이 아닌 일본, 누군가는 일본에게 따져야 한다

독일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끊임없는 망언과 잘못된 역사의식을 철저하게 단속하려는 의지가 없어보이는 일본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옆 사람의 발을 밟으면 '미안합니다'라는 사과를 되풀이하는 일본인이다. 옆 나라의 운명을 참혹하게 짓밟아 놓고도, 망언에다가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이 없는 일본이니, 이건 분명 정상이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일본은 한국과의 선린우호 관계를 진정으로 원하는 건지, 아니면 단지 한국 시장만을 원하는 건지, 일본 정부에게 명백하게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계없이 누군가는 외교의 다변화를 명분으로 중국과 러시아와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무책임한 망언과 인색한 사과, 더 이상 신의를 가질 수 없는 일본이라면, 일본과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하자는 주장도 어디선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문제에서 우리 정부는 초연해야 한다. 정부는 평화를 외치며 코란을 들고 서있으면 될 터이고, 누군가가 칼을 빼들고 서있으면 되리라.

망언을 일삼는 일본 정치가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던 김영삼 대통령의 호언장담도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망동'으로 일본의 정치가들을 흔들어대야 할 것이다. 다만,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면서도 잠들지 않는 현해탄을 바라보는 마음이 스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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