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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의 통일전선탑
쑥섬의 통일전선탑 ⓒ 박도
'만경대 고향집'에서 안내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발한 버스가 평천강안거리(대동강 강변도로)를 지나 충성의 다리를 건너자 쑥섬이 나왔다. 이 섬은 서울의 여의도처럼 토사가 퇴적하여 생긴 강 가운데 섬이었다.

이 곳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대표자들이 배를 타고 이곳에 건너와서 회담한 장소로 북측에서는 이곳을 '쑥섬 혁명사적지'로 만든 뒤 통일전선탑을 세웠다. '남북연석회의'를 안내원의 설명과 문헌을 참고하여 간단히 요약해 본다.

남북연석회의란 1948년 4월 1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의 준말이다. 이 남북연석회의는 분단이 현실화되는 때에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반단정, 민족통일운동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이 남북연석회의는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국 측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기면서 제기되었다. 유엔에서는 미국 측의 제의에 따라 유엔한국위원단이 만들어지고, 1848년 2월 26일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 결의안이 유엔에서 통과되자 남북분단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다.

이렇게 되자 자주적 통일국가수립을 요구하는 모든 정치세력들이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시국에 남북대표들이 만나서 통일정부수립을 논의해야 한다는 요구가 대중적으로 제기되었다.

남북지도자들이 만나서 담소하였던 미루나무 아래 돗자리
남북지도자들이 만나서 담소하였던 미루나무 아래 돗자리 ⓒ 박도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1948년 2월 10일 김구 선생은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을 발표하여 "남북을 통일한 완전한 독립의 길만이 유일한 숙원"이라고 선언했다. 곧 이어 김규식 선생과 함께 남북정치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북로당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민전의장 김두봉에게 보냈다.

이 서한에서 김구 선생은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할 것", "남북정치 지도자 간의 정치 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 등의 지도자들도 이 회의에 호응케 되었다.

이러한 제안에 북한이 "남조선 단독선거실시를 반대하는 남북조선의 모든 사회단체대표들과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한다는 서신을 보냄으로써 이 회의가 성사되었다.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 김구 선생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남북연석회의에 남쪽에서는 41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총 396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지도자들은 수차례의 회합 끝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남한단독선거는 실시된다고 하더라도 절대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고,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가 끝난 뒤 5월 2일 쑥섬에서 또 다른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의 이른바 '4김 회담'과 남북요인 15명이 회동한 '남북지도자협의회'였다.

이 회담 후 김구 선생은 남쪽으로 돌아와서 계속 '통일정부 수립'를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대중적 영향력을 끼치게 되자, 단정 세력들은 1949년 6월 26일 대낮에 김구 선생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이 버드나무 아래서 '남북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한 분들의 주연이 있었다고 함
이 버드나무 아래서 '남북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한 분들의 주연이 있었다고 함 ⓒ 박도
'반외세 자주통일'의 뿌리

비록 그때의 남북연석회의는 실패로 끝난 것처럼 여겨지지만 우리에게 '반외세 자주통일'에 대한 원칙, 곧 통일은 민족 내부의 주체적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심어준 역사적 회의로 남아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역사적인 남북공동선언의 주춧돌이 되었다.

이 회의를 기념하는 통일전선탑 아래에는 다음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정견이 서로 다른 수많은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론의하고 견해의 일치를 본 일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남북련석회의는 우리 민족 력사에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기치하에 각계각층의 애국적 인사들을 묶어세운 위대한 화합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김일성"

탑 뒷면에는 이 회의에 참가한 사회단체 이름과 쑥섬협의회에 참가한 대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분들 이름을 새긴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 김책 김구 김규식 홍명희 백남운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최동오 김종항 정진석
1948년 5월 2일

나룻배 앞에 선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중앙위원들
나룻배 앞에 선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중앙위원들 ⓒ 박도
이날은 올 들어 가장 무더운 날로 평양의 기온도 30도는 웃돌 듯한데도 검은 치마 흰 저고리를 입은 북녘의 여성 안내원 특유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지난 역사를 들려주었다.

대동강가에는 그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리용하신 나룻배'가 전시되고 있었는데 김일성 배지를 단 우리말이 다소 서툰 일행이 서성거렸다.

내가 카메라로 쑥섬 일대의 여러 장면을 담자 그분들이 소속을 물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하였더니, "아, 오마이뉴스!"라고 감탄하더니, 자기들은 재일본 조선문학예술가동맹 중앙위원들이라고 하면서 일본에서도 <오마이뉴스>를 본다면서 나룻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주면서 혹 일본 취재길이 있다면 자기들에게 연락해 주면 길안내를 하겠다고 모두 명함을 꺼내 주었다.

'쑥섬 혁명사적지'에는 홍명희 조소앙 선생이 장기를 두었다는 원두막, 참가 대표자들이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앉았다는 곳에는 원형 그대로 돗자리가 유리관에 보존되어 있었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서 조촐한 주연과 오찬을 나눴다는 나무는 더욱 굵어진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홍명희 조소앙 선생이 바둑을 두었다는 원두막
홍명희 조소앙 선생이 바둑을 두었다는 원두막 ⓒ 박도
처녀의 매력

내가 탄 버스는 4호 차로 가장 뒤차인데다가 내 좌석은 뒷부분이었다. 맨 뒤 자리에는 남녀 안내원이 앉았는데 그들은 평양친선병원 소속의 의사와 간호원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의 수행의사로 따라 다닌다고 하면서 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이름이 '김은경'이라는 여성 간호원이 복스럽고 귀여웠다. 나이와 혼인 여부를 묻자 서슴없이 미혼으로 24세라고 했다.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통일된 다음 남쪽 총각과 결혼할 겁네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마침 내 아들이 있는데 며느리삼고 싶다고 말하였더니, 옆의 의사 동무와 함께 관심을 가지면서 아들 나이와 직업 들 꼬치꼬치 물었다. 올해 27세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관련회사에 다닌다고 말하자, 장래가 유망한 직종이라면서 빨리 통일이 되어 서로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하는 새, 다음 관람지인 주체사상탑 아래에 버스가 섰다.

"김은경 동무, 사진 한 장 박읍시다. 아들 보여주게요."
"아니 됩네다. 저는 사진 발을 잘 받지 않습네다. 조선에서는 처녀가 먼저 사진을 보여주는 법이 없습네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들 사진을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일없습네다."

금세 얼굴이 빨그레 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디나 처녀는 수줍음을 타나보다. 하기는 거기에 처녀의 매력이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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