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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모양으로 키운 무궁화 화분. '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품종으로 19일까지 열리는 서울광장 '무궁화 전시회'에 선보이고 있다.
한반도 모양으로 키운 무궁화 화분. '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품종으로 19일까지 열리는 서울광장 '무궁화 전시회'에 선보이고 있다. ⓒ 이덕림
아침마다 무궁화가 줄기차게 피어나는 8월, 60돌 광복절을 보냈다.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경축식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일었다. 식장에 무궁화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식단에 대형 무궁화 화분 하나쯤 자리잡도록 했어야 마땅했다.

나라꽃 무궁화는 일제 강점기 겨레와 함께 수난을 당했음을 잊었는가? 광복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 의당 함께 있어야할 나라의 표상이 아니던가? 태극기 물결 속에 지금 한창 제철을 만나 이 강산을 수놓은 무궁화가 어울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제는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무궁화를 모질 만큼 '탄압'했다. 누천년 이 강토를 터전 삼고 자라온 무궁화를 멸종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특히 3·1만세운동 이후에는 전국의 무궁화를 뽑아 없애 버리는 일까지 벌였다. 한 가지 식물이 이처럼 혹독한 탄압을 받은 예가 역사상 또 있을까?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 기도'에 비견될 전무후무한 '식물판 홀로코스트'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독립협회를 결성해 활동하던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이 홍천 보리울에 낙향, 무궁화 묘포장을 만들고 묘목을 길러 보급하기에 노력했던 일은 바로 무궁화를 지킴이 곧 민족정신을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였음이랴.

무궁화는 그동안 꾸준한 육종 노력을 통해 다양한 품종을 개발해 냈다. 세계적으로 250여 종, 국내에만도 200종류가 있다. 사진의 흰 무궁화는 백단심계의 대표적인 꽃 '서호향'이다.
무궁화는 그동안 꾸준한 육종 노력을 통해 다양한 품종을 개발해 냈다. 세계적으로 250여 종, 국내에만도 200종류가 있다. 사진의 흰 무궁화는 백단심계의 대표적인 꽃 '서호향'이다. ⓒ 이덕림
무궁화가 겪은 고초는 그뿐이 아니다. 일제하 내내 무궁화는 험담(險談)과 악평(惡評)에 시달렸다. '진딧물이 많이 끼는 지저분한 나무'라는 둥 '별 쓸모없는 변변찮은 나무'라는 둥 근거 없는 비방에 휩싸였었다. 일제가 퍼뜨린 헛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무궁화는 고맙기 그지없는 나무이다. 우리 조상들은 무궁화를 버드나무와 짝지워 논가에 심어 해충을 잡아먹는 천적들에게 보금자리로 제공했다. 버드나무는 무당벌레가 즐겨 사는 나무이다. 무당벌레의 애벌레는 버드나무 잎을 먹고 자란다. 성충으로 자라려면 벌레를 먹이로 해야 하는데 초봄까지는 빠르게 움직이는 벌레를 따라 잡을 만큼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옆에 있는 무궁화나무로 옮겨 가서 거기 낀 진딧물을 포식한다.

성충으로 자라나면 논밭의 갖가지 해충을 잡아먹어 살충제를 뿌리지 않아도 해충이 없어진다. 무궁화는 이렇게 땅을 오염시킴이 없이 천적을 이용한 농사짓기에 큰 도움을 준다. 이런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궁화는 진딧물이 많이 끼어 키우기 힘들다'고 말한다. 무궁화나무 곁에 버드나무를 심어 진딧물을 퇴치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모르는 탓이다"


청단심계의 무궁화 '신충무'로 꽃잎에 푸른 기운이 감돈다.
청단심계의 무궁화 '신충무'로 꽃잎에 푸른 기운이 감돈다. ⓒ 이덕림
'두레공동체'를 일군 김진홍(金鎭洪) 목사의 '세상살이 이야기'에 실린 내용이다.

장미, 모과, 마가목 등은 모두 진딧물이 좋아하는 나무들이다. 장미나 마가목에 진딧물이 잘 낀다고 해서 그들을 지저분한 나무로 보는가? 무궁화 역시 진딧물이 좋아하는 나무일 뿐 지저분한 나무일 수가 없다.

무궁화는 용도를 따져서도 매우 가치 있는 나무이다. 동의보감에는 "사혈(瀉血)을 멎게하고 설사 후 갈증이 심할 때 달여 마신다"고 했다. 한방에선 껍질과 뿌리를 벗겨 말린 것을 '근피(槿皮)'라고 하여 약재로 쓴다. 해열, 해독, 소종(消腫)에 효과가 있으며 기관지염, 장염(腸炎) 및 대하(帶下) 치료에도 달여서 복용한다. 어린 잎을 따서 차로 쓰기도 하고 수피(樹皮)에서 얻는 섬유질은 옷감과 제지 재료가 된다. 경제수(經濟樹)로도 결코 처지지 않는다.

'근역(槿域)', '근화향(槿花鄕)'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가리키는 것처럼 무궁화는 우리 겨레가 대대로 이어 살아온 이 땅의 표상이다.

"군자의 나라엔 무궁화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피고 진다({君子國有薰華草. 朝生暮死)"

기원전 4세기 때 지어져 중국 최고의 인문지리서로 꼽히는 산해경(山海經)은 그 당시 이미 한반도에 무궁화(薰華草)가 많이 자라고 있음을 전해 주고 있다. 무궁화가 고조선 때에도 이 땅을 수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단심계의 '원화'와 홍단심계의 '화홍'이 어울려 피어 있다.
백단심계의 '원화'와 홍단심계의 '화홍'이 어울려 피어 있다. ⓒ 이덕림
무궁화의 영문 이름은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이다. 기독교의 찬송가에도 예수를 '샤론의 꽃'으로 비유한 가사가 있을 만큼 '샤론'은 '가나안의 비옥한 땅'으로 '샤론의 장미'는 곧 '축복받은 땅에 피는 장미'라는 복스러운 뜻이다.

한때 국화(國花)를 다시 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논란이 인 적도 있지만 무궁화가 우리의 국화임은 축복이요, 자랑이다. 무궁화의 나라꽃 됨은 겨레의 이심전심이 모여, 자연발생적인 합의에 의해 된 것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고 소중하다.

"무궁화는 은자(隱者)가 구하고 높이는 모든 덕을 구비하였다. 무궁화에는 은자가 대기(大忌)하는 속취라든가 세속적 탐욕 내지 악착을 암시하는 데가 미진도 없고, 덕 있는 사람이 타기하는 요사라든가 방자라든가 오만이라든가를 찾아볼 구석이 없다. 어디까지든지 점잖고 은근하고 겸허하여, 너그러운 대인군자의 풍도를 가졌다."

자연에 대한 통찰이 남달랐던 에세이스트, 영문학자 이양하(李敭河) 교수의 수필 '무궁화'의 한 대목이다. "무궁화야말로 '은자(隱者)의 나라'에 걸맞는 '은일(隱逸)의 꽃'이기에 국화로 삼기에 적합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한국에 오래 살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잘 이해했던 영국인 리처드 러트 신부도 우리 꽃 무궁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들의 왕실이나 귀족의 문장紋章), 또는 상징을 나라꽃으로 만들었으나 한국만은 다르다. 황실의 상징 이화(李花)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를 국화로 정한 것이 놀랍다. 이는 곧 민주주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옴을 말해준다."

그가 지은 '풍류한국'에서 한 말이다. 그는 60년대 초 '사상계'지(誌)가 제정한 '다산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초여름 첫 꽃봉오리를 열고 나서 가을 산들바람이 불 때까지 백날이 넘게 날마다 새 꽃을 피우는 무궁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한밤중 자정에 꽃망울을 부풀리기 시작해 이윽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피어나는 꽃. 그 무엇보다 겨레와 함께 비탄의 세월을 견뎌내고 겨레의 가슴에 아련히 살아 있는 꽃, 무궁화. 갑년(甲年)을 맞은 광복절. 무궁화의 덕성(德性)을 되새겨 보며 나라꽃 무궁화 사랑을 다짐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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