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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 오후 북측 당국 및 민간 대표단이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를 위해 입장하고 있다. 가운데 김기남 북측 단장 왼쪽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사람이 림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른바 '8·15 민족대축전'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이 종래의 기준으로 보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가히 분단 이후 '최초'라는 수식어를 연거푸 붙이게 하는 대담한 파격 행보이다.

지난 14일에는 북측 공식 대표단으로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을 참배(혹은 참관)한 데 이어 역시 15일에는 서대문 형무소와 백범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오늘 16일에는 역시 북한 대표단으로서는 '최초'로 국회를 방문하고, 오후에는 입원중인 전직 대통령(김대중 전 대통령)도 최초로 위문 방문했다.

이 모든 대담한 언행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재가'를 받은 것이다.

김기남 북측 대표단장은 '얼굴마담', 림동옥 통전부 제1부부장이 '실세'

▲ 지난 14일 워커힐 호텔에 도착한 북측 대표단의 림동옥 통전부 제1부부장이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북측 대표단 단장으로 현충원을 방문한 김기남(79) 노동당 비서는 현충원 참배에 대해 "조국광복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 있어 방문하겠다는 의견을 제기한 것"이라고 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동행한 림동옥(75)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 제1부부장은 "현충원 참관은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기본은 이념을 초월하자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기남 비서는 노동신문 책임주필과 노동당 선전선동부장, 당 중앙위 선전담당 비서를 거쳐 현재 당 교육담당 비서를 맡고 있다. 김 비서는 지난 6월 평양에서 열린 6·15 5주년 기념 행사에도 북측 당국대표단 단장을 맡아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대좌한 적이 있는 '구면'이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의전관행에 비추어 대표단장은 대개 대외용 '얼굴 마담'이다. 이번 '8·15 민족대축전'에는 김 비서 외에도 우리에게 낯익은 '대남일꾼'인 안경호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도 북측 민간 대표단 단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대표단의 '실세'는 뭐니뭐니 해도 림동옥 통전부 제1부부장이다.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대남부문(통일전선사업)을 총괄하는 부서인데 그는 김용순 전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의 사망 이후 '부장 없는' 통전부의 제1부부장을 맡아 대남 전략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얘기해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대남 공작원을 침투시킨 '간첩두목'인 셈이다.

국정원의 '림동옥 파일'에 따르면, 1960년대 초부터 40여년간 대남사업에 종사해온 림 제1부부장은 1972년 '림춘길'이라는 가명으로 수행기자 자격으로 남북적십자회담에 나오면서 남측에 처음 알려졌다.

이어 79년부터 조평통 부위원장을 맡아 85년 적십자회담 때는 '자문위원'으로, 그리고 90년대 남북 고위급회담 때는 '수행원'으로 참여했지만, 사실상 대표단을 통제하고 회담전략을 지휘한 '막후실세'였다(물론 우리측도 남북 적십자회담 초기에는 중정-안기부 직원들이 적십자 직원으로 위장해 회담에 참여했다).

물론 국정원은 그런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전에 회담의 형식과 내용을 사전조율하기 위해 그해 5월 평양을 비밀방북한 임동원 국정원장-김보현 대북전략국장(전 3차장)을 맞이한 '카운터파트'도 김용순 통전부장-림동옥 제1부부장이었다.

6·15 정상회담 만찬 테이블에서 처음 본명으로 등장한 '간첩두목' 림동옥

▲ 16일 북측 대표단이 사상 최초로 국회를 방문했다. 국회에서 열린 오찬에서 림동옥 노동당 통전부 제1부부장(가운데)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처럼 중요한 남북회담마다 빠짐없이 참석해 북측 대표단을 통제하던 '막후실세'로서 직책이 '조평통 부위원장'으로만 알려졌던 '림춘길'이라는 인물이 마침내 가명을 벗고 '림동옥'이라는 본명으로 등장한 것은 남북 6·15 공동선언 및 정상회담 만찬 테이블에서였다.

북한 중앙방송은 그해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이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소식을 전하면서 이 자리에 림동옥 당 제1부부장이 동석했다고 밝혔다. 림동옥 제1부부장이 북한 언론에 보도된 것은 극히 이례적으로, 그는 지금까지 대외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인물이다.

당시 특별수행원의 자격으로 방북해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현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은 기자에게 "남북 정상회담 현장에서 '대남전략의 수정'을 직감할 수 있었던 상징적 사건은 림동옥 통전부 제1부부장의 등장이었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림 부부장의 역할은 남북 정상이 6·15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역사적인 자리에 그가 동석한 것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지난 93년께부터 통전부 제1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용순 당중앙위 비서 겸 통전부장과 함께 부서 업무를 총괄해왔다.

그리고 그는 2000년 9월 당시 김용순 비서의 남한 방문길에 대남사업의 핵심 실무라인을 거느리고 동행해 당시 임동원 원장과 김보현 3차장의 영접을 받고서 남한 대중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남과 북의 비선(秘線)조직이 이처럼 한꺼번에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에서 공개 대면한 것은 남북 정보기관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을 가진 전금진·송호경(사망) 등 다른 통전부 간부들과 달리 외곽단체의 직함을 가지고 대외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그가 남북협상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김정일 위원장의 강한 의지와 자심감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김정일 위원장이 음지에서 대남협상을 지휘통제하던 통전부 라인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대남전략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그만큼 남북관계에서 풀어야 할 '고리'가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그동안 베일에 가렸던 남북 정보기관의 대북-대남사업의 핵심 라인업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양측 모두 돌아설 수 없는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림동옥의 전면 등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와 자신감 반영

▲ 지난 2000년 9월 12일 제주를 방문한 김용순 노동당비서와 림동옥 당 부부장이 한라산 '오백나한'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보현, 김용순, 임동원, 림동옥.
ⓒ 사진공동취재단
2000년 9월 당시 추석 무렵에 김용순 비서와 함께 남한을 방문한 림동옥 부부장의 카운터파트였던 김보현 전 국정원 대북담당 차장은 당시의 비화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시 김용순과 림동옥이 갑자기 '남쪽에 오겠다'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하겠다'고 했다. 이는 과거의 파괴 공작차원은 아니고 화해와 협력 차원에서 당당히 걸어가자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라고 했다. 우리도 고민했으나 저쪽이 당당히 오면서 공개를 요청했다는 점에서 우리(국정원 수뇌부)도 나가자고 했다.

김용순과 림동옥을 내려보낸 것은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하면서 작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는 북한을 끌고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변화를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변화의 버팀목인 군부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먼저 군부를 동참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군부의 상징인 조명록 차수에게 술을 따르게 했으며, 남측에 김일철을 보내 변화의 공범으로 만들고 마침내는 조명록을 '철천지 원수국'인 미국까지 보냈다. 그리고 군부와는 별도로 대남 공작팀을 남측에 보내 '남조선이 왜 잘사는지를 직접 보고 오라'고 했다."


이러한 김정일의 작심과 변화의 흐름을 타고 북한을 개혁·개방의 길로 끌어내기 위해 국정원은 당시 북측 '간첩두목'들을 상대로 '뺑뺑이를 돌리는 장난'을 쳤다.

국정원은 당시 대남 공작 수뇌부로 구성된 김용순 특사 일행을 일부러 공군기에 태웠다. 공군기는 비행고도가 낮고 시간도 30∼40분이 더 걸린다. 우리의 산야와 도로를 가까이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경주에 갈 때는 대구에 내려서 고속도로의 밀린 귀향차량을 보여주고, 올 때에는 비행기 고도를 더 낮춰 서울 야경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일부러 서울 테헤란로 상공에서는 한 바퀴 더 돌렸다.

다시 김보현 전 차장의 얘기다.

"북한은 전력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보고 놀라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김용순과 림동옥에게 간간히 어떠냐고 물어봤다. 단답형으로 대답했는데 '좋은데요', '잘됐는데'라고만 했다. 이는 말로 표현못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김정일 지시대로 자신들이 보고 겪은 것을 보고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쪽에 기대면 살 것'이라고 보고하도록 '장난'을 친 것이다."

국정원 '장난' 이후 5년만에 서울 와 '민족시인'으로 변신하다

▲ 지난 2000년 9월 13일 오후 김용순 노동당비서 일행이 경주 불국사를 방문해 다보탑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림동옥 당 부부장.
ⓒ 사진공동취재단
이처럼 5년 전에 활발하게 가동된 임동원-김보현 대 김용순-림동옥간의 막후 채널은 서해교전 등 남북 간에 발생한 군사 충돌이나 오해를 푸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대화 채널은 노무현 정부 들어 대북송금 특검이 이뤄지면서 금이 가더니 임 전 원장의 퇴임과 김용순 비서의 사망(2003년 10월)이 이어지면서 더 이상 가동되지 못했다.

이후 지난해 7월 취임한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서 지난해 말부터 통일부와 국정원을 참여시킨 가운데 대북 대화채널 가동에 적극 나서 김용순 비서 사망 이후 대남 문제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지켜온 림동옥 부부장과의 막후채널을 지난 5월 남북 당국자회담을 통해 복원시켰다.

그리고 림 부부장은 지난 6월 17일 '김정일·정동영 대동강 영빈관 면담' 때 북측 관계자로서는 유일하게 배석해 여전히 '실세'임을 드러냈다.

림동옥 부부장은 이 현충원 참관에 동행한 임동원 전 국정원장에게 "5년 전 우리가 이 문제로 얼마나 싸웠느냐"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전 논란이 됐던 금수산기념궁전(김일성 주석의 시신 안치장소) 참배 문제를 거론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당시 임동원 원장에게 김대중 대통령 등 우리 정부대표단의 금수산궁전 참배를 수차례 요구했었다.

그래서 "현충원 참관은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기본은 이념을 초월하자는 것"이라는 림 부부장의 발언은 의미가 더 심장하다.

14일 현충원을 참관한 남북 당국 대표단을 위해 정동영 장관이 주최한 15일 신라호텔 오찬에서 림동옥 부부장은 "우리는 서울을 보았다/이국의 도시가 아니었다/평양과 똑같은 민족의 도시였다"로 시작되는 짤막한 자작시를 수첩에 적어 와 낭송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자 정 장관은 강원용 목사 등 이날 오찬에 참석한 각계인사에게 림동옥 부부장을 "과거 림춘길이란 가명을 썼으며 북쪽에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무서운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간첩두목'이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국정원의 분석에 따르면, 2000년 9월 그의 첫번째 '서울시찰'이 "서울의 '발전상'을 보고오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5년만의 이번 두번째 서울시찰은 "서울의 '진심'을 살피고 오라"는 김 위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의 '장난'으로 '말로 표현 못할 충격'을 받은 이후 5년만에 서울에 와 '간첩두목'에서 '민족시인'으로 변신한 림동옥 제1부부장이 필설로 읊은 "평양과 똑같은 민족의 도시였다"는 울림대로 그가 서울을 가슴으로 느꼈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17일 오전 11시30분에 북측 대표단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오찬을 함께 한 뒤에 3박4일 일정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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