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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산강의 명칭이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올해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일제문화잔재를 바로 알고 바로 잡기' 제안공모 사업이 기념사업회에서 추진되었는데, 그중 최고상인 으뜸상으로 선정된 제안 내용에 영산강의 명칭과 관련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일제가 우리 고유의 강 이름을 의도적으로 변경해서 왜곡시켰고, 그것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제안에 따라 으뜸상으로 선정되었는데, 제안 내용을 접수한 조법종(우석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강산 이름까지 바꾼 일제의 만행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지금껏 일제가 강 이름까지 바꾼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 제안에서는 대표적으로 만경강과 영산강의 예를 들었는데, 그 중 영산강이 우리 고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큰 관심을 끈다. 영산강과 관련된 제안된 내용을 보면 "영산강 이름을 당시 사용하기는 했으나, 원래는 독자적 명칭인 사호강이 맞는 표현"이고 "사호강의 지류로 영산포에 예속된 영산강을 일제가 곡물수송을 하면서 더 많이 이용하자 지금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영산강의 원래 명칭은 '사호강'이 더 맞는데, 일제에 의해서 영산강으로 개명되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발표가 있은 후에 영산강이라는 명칭을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나주시를 비롯해서 각계의 강한 반발이 제기되었고, 급기야 추진위원회는 재고증을 거치기로 하고 공식입장 표명을 뒤로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향토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산강 명칭과 다양성

영산강의 원래 명칭이 '사호강'이었는데, 이를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영산강'으로 고쳐 불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좋은 취지로 시행한 행사인데, 지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다소 어설프게 발표가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나주시민들과 영산강을 젖줄로 살고 있는 남도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상황이 된 것 같다.

다만 제안을 한 분이 일반 시민이 아니고 현직 사학과 교수이기 때문에 왜 그런 주장이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된다. 고유 지명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럼 영산강의 명칭 유래를 살펴보자. 먼저 강의 이름을 호칭할 때 강 유역 전체가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되어서 대대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영산강 명칭의 경우 본류와 지류에 따라 수십 개의 명칭이 기록(대동여지도 등)에 등장한다. 즉, 지역에 따라서 주민들이 부르는 명칭이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주 동쪽 상류는 광탄강(廣灘江), 영산포 부근은 남포강(南浦江)·영산강(榮山江), 함평 쪽은 사호강(沙湖江), 더 남쪽으로 무안 쪽으로 내려와서 곡류하는 지역은 곡강(曲江)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동시대에 어느 지역에서는 사호강이라고 부르고, 혹은 영산강이라고 부르기도 한 것이다.

영산강 명칭의 유래

영산강의 명칭이 여러 개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영산강'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이 되었을까. 호남의 내륙을 관통하는 영산강은 예로부터 이 지역 수운(水運)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조창(漕倉) 가운데 하나인 영산창(榮山倉)이 영산포에 설치되었다. '창(倉)'이라는 것은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영산창은 조선 전기 9개의 지방창고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당연히 그 일대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주변의 강 이름을 '영산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지명 유래에 하나의 정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외에도 영산강 명칭에 대해서 다른 설화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영산강'이라는 이름은 깊은 뿌리가 있고 조선시대에도 사용된 명칭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영산포'와 관련되어 '영산강'이라는 이름이 불리었다는 그 유래를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영산'이라는 지명 자체는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영산'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기록에는 고려말엽 왜구들이 섬에 대한 노략질이 심해지자 흑산도 사람들이 나주 남쪽 남포강가에 피난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곳을 '영산현(榮山縣)'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산'은 '흑산'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려말엽 조선 초에는 이른바 '공도정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섬에 대한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아예 섬을 비워버리게 하는 정책이다. 매우 소극적인 해양정책으로 고대에 융성했던 우리의 해양문화가 발전보다는 단절의 길로 들어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당대 섬에 사는 사람들을 육지로 옮겨와서 살게 했다. 그때 지금의 신안군 흑산도(영산도) 부근 사람들이 나주 남포로 이주해서 살았기 때문에 '영산'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 '영산포'나 '영산강' 모두 그 뿌리가 깊은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 속에 등장하는 영산강 명칭

영산강이라는 명칭이 옛 기록에도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역사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에 그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실록(1725년 3월 25일) 기사에 정택하(鄭宅河) 상소문에서 '나주 영산강'(羅州 榮山江)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오히려 사호강이라는 또 다른 영산강의 명칭은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외에도 김정호의 대동지지, 정약용의 경세유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옛 사료들에서 영산강의 명칭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강 유역 전체를 지금처럼 영산강으로 통칭하게 된 것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기라고 보여진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번 제안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영산포와 영산강

영산강 명칭이 강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게 된 계기와 그것이 일본인들에 의해 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자. 조선시대의 영산창은 이후 법성포에 법성창이 설치되어 옮겨졌고, 구한말 영산포는 한적한 작은 포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영산포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개항 당시 목포 거류지의 범위 내에 묶여 있던 일본인들은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개항장에 머물지 않고 보다 내륙 깊숙이 진출한다.

당초에는 육지에서 수확된 미곡을 목포를 통해서 침탈하는 상황이었다가 점차 직접 토지를 매입하고, 소작인을 사서 농업에 종사하여 보다 큰 이익을 내기 위해 활동하는데 그 근거지가 바로 '영산포'였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나주 영산포에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근대 영산포의 역사는 일제의 조선수탈과 함께 시작되어 일본인들의 상업적 필요성과 맞물려서 번성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목포와 함께 호남곡창의 수탈기지가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활동 무대인 영산포 부근의 강 명칭인 영산강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널리 사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나오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다만 이번 제안 내용의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강의 명칭을 개명했다는 부분인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산강의 명칭은 아주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영산포가 번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이름이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일본인들이 직접 기록한 영산강 명칭 유래

이와 관련된 자료를 찾던 중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보기 어려운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9년에 일본인들이 만든 <사적목포>라는 책에 영산강 이름의 내력을 언급한 부분이 있어 주목이 된다. 이 책은 당시 목포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목포유적에 대한 연혁과 설명을 풀어놓은 것이고, 발행시기 상 여러 면에서 식민사관이 반영된 책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영산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면 1929년 시기에 발행된 이 책에도 영산강이라는 이름을 강조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 책에 나오는 첫 장의 제목은 "사호강(沙湖江)의 발선(發船)"이라고 해서 사호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사호(沙湖)는 영산강(榮山江)의 별칭이나 옛 이름"이라고 밝히고 "<문헌비고>(文獻備考) 같은 한국의 옛 기록에는 영산강(榮山江)이라고 기재되지 않았고 사호강(沙湖江)이라고만 기술(記述)되어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 책에는 영산강(榮山江)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조선시대 때 영산포(榮山浦)가 영산창(榮山倉)의 소재지가 된 다음이고 이곳이 전라남도의 공미(貢米) 집납지(集納地)였던 관계상 자연스럽게 선박의 출입이 빈번(頻繁)한데 기인(起因)한다"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

오히려 일본인이 쓴 기록에 왜 영산강이라는 명칭이 왜 유래되었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는데, 이 자료는 "영산강 명칭이 일본인들에 의해서 개명된 것"인지에 대한 논란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올바른 일제 잔재문화 청산

결국은 이번 영산강 명칭에 대한 논란은 관련 자료를 철저하게 고증하지 못한 일종의 해프닝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추진위원회 측에서 적어도 최고상을 선정할 때는 관련 지역과 연구기관의 자문을 받았어야 했다.

전남 지역에는 영산강을 연구하는 전문학자나 단체들도 있고, 최근 들어 영산강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되어 여러 단체들이 영산강 문화체험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번 으뜸상 선정 오류로 인해 본 사업의 전체 취지도 좀 퇴색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일제 잔재 청산운동을 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객관적인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한 방송사 뉴스에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 장면이 입수되었다고 보도된 영상화면이 나중에 중국에서 만든 영화 속 화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오히려 일본 언론에서 한국 매스컴이 역사를 왜곡하고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정반대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런 사례가 자주 발생하면 우리 민족의 염원인 일제 잔재 청산과 일본의 진정한 역사 반성을 요구하는 노력까지 퇴색될 수 있다. 오류가 다시 생기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가 요구된다. 끝으로 이번 영산강 명칭에 대한 논란이 우리 고유 명칭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바로 새기고, 정리하는 발전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최성환 기자는 신안문화원 사무국장이자, 목포대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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