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등산 경험이 없기에 비 내릴 때 산에 오르려니 슬쩍 걱정이 됐다. 그래도 어렵사리 예까지 왔는데 발걸음을 돌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석에서 축령산으로 가는 길은 고불고불한 오솔길이었다. 마치 다람쥐나 너구리 한 마리가 폴짝 하고 튀어나올 것 같은 좁은 길목 말이다. 오른편에는 우뚝 솟은 산이 서있고 왼편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축령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가 내렸다. 산은 자욱한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천천히 산에 오르며 노래를 불렀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축축한 땅을 밟는 느낌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빗물에 젖은 잎새들은 풀향을 더욱 진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흙과 풀냄새와 빗소리의 조화,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되도록 눈과 귀와 코와 입으로 자연을 느끼려고 했다.
20분 정도 올랐을까. 작게 들리던 계곡의 물살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쏴아-하는 소리가 가슴 속까지 후련하게 해주는 듯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이 산의 묘미란….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갈증이 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에 보면 주인공 오카다 도루가 찾던 '물이 말라버린 우물'이 있는데 그 순간 그 우물이 오버랩 됐다. 그리고 곧 발견했다. 약수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눈에 띄었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것 같은 돌로 만들어진 약수터는 묘한 느낌을 주었다. 오랫동안 비와 바람과 햇빛으로 단련된 것 같은 멋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을 축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안개는 산길을 자욱하게 가리고 빗줄기는 점점 세게 몰아쳤다. 우산도 없이 우비도 없이 오른 터라 온몸은 비에 젖어 있었다. 함께 동행한 이가 말했다. “이번 차에 산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해버리자”고. 그렇게 생각하니 축축한 산과 내가 하나가 된 기분이 들었다.
걷다 지쳐 바닥에 철퍼덕 하고 앉았다. 엉덩이 옆에서 하늘거리는 강아지풀을 발견했다. 짙은 초록의 강아지풀. 어렸을 적 간지럼을 태우고 놀았던 그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강아지풀은 봄의 문턱에 고개를 내민 아지랑이처럼 상쾌한 기분을 선사했다.
한참 바라보고 매만지다 보니 폴짝~하고 무언가 튀었다. 개구리다.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가는 모습이 어찌 그리 귀여운지.
10분쯤 앉아 있었나. 축축한 바지에 흙이 다 묻었다. 그런대로 기분이 괜찮았다. 5km 정도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 있다니 기운을 내서 올라가자고 중얼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어둑어둑한 숲길 옆으로 바위를 보는 재미도 등산의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온전히 자연의 힘으로 존재하고 자연의 힘으로 변화되는 바위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바위 사이로 돌이끼와 풀들이 뿌리 내린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조금만 밀면 바위가 무너질 것 같은 비대칭형인데도 불구하고 계곡 옆에 기대에 있었다. 이걸 아슬아슬함의 미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이것저것 보면서 오르다보니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전 11시. 그때까지도 안개는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바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세 그루였다. 단아하면서도 청아한 모습의 나무는 바위 위에서 고독하지만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비오는 산의 풍경은 미로 같다. 바로 10m앞도 뿌옇게 가려져 알 수 없는 그 길을 걷고 또 걸으면 퍼즐을 다 맞췄을 때의 후련함처럼 정상이 나타나고, 실없는 웃음이 난다. 역시 정상도 안개라는 베일에 가려져 산을 명확하게 볼 수 없지만, 이것으로도 됐다. 물비늘에 뒤덮인 산의 새로운 풍경을 마음껏 만끽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