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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처서(處暑). 두어 시간 걸려 배추를 심었다. 나는 몇 년째 처서에 맞춰 배추를 심었다.
이날을 위해 나는 한 달 이상을 준비했다. 배추 심는데 무슨 준비를 한 달이나 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배추를 심을 포트, 상토(床土 모판흙), 배추종자, 침종을 위한 목초 액, 숯, 모래, 얼기미 등 준비물이 많다. 숯은 작년 겨울부터 상토 만들 때 쓰려고 아궁이에서 모아 온 것이다.
서울 사는 후배네 아파트에 습기가 찬다고 하여 좀 보냈는데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배추농사를 얼마나 하기에 이리 복잡하고 야단스럽냐고 하지 말라. 해당 시기에 맞게 틈틈이 준비해 둔 것이라 야단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제일 준비가 오래 걸린 것은 상토였다. 어떤 농가는 아예 시장에서 배추모종을 한 판에 7천원이나 8천원에 사서 심기도 한다. 한 판 160포기를 8천원에 사니 나처럼 직접 만드는 것보다 경제적이다. 어떤 농가는 시장에서 상토를 사다가 배추씨앗을 포트에 심는다. 그러면 보름이면 옮겨심기를 할 수 있게 자라기 때문이다.
나는 상토를 직접 만들어 쓴다. 사다 쓰는 상토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아서다. 한 달 전부터 부엽토와 쌀겨를 섞어 띄우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밭 흙도 섞고 쌀겨도 더 넣어 지금은 미생물이 버글거리는 최상의 흙이 되어 있다.
상토 만드는 데는 몇 삽만 쓰면 되고 나머지는 배추밭에 뿌려 줄 생각이다. 계속 쌀겨와 왕겨 등을 넣어 뒤집기를 했는데 양이 점점 늘어나 두세 리어카 분량은 된다. 씨앗은 직접 채종을 해서 심어 봤는데 기대 이하였다. 할 수 없이 종자는 사다 심지만 그냥 심지 않고 나름대로 '침전'이라는 조치를 취한다.
머릿속으로 준비물을 일일이 점검했다. '이상무'였다. 소매를 걷어 붙이고 일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농협에서 6500원 주고 사 온 '금초롱배추'라는 씨앗을 목초 액 200배액에 담갔다. 종자 소독을 하는 것인데 목초 액은 발아를 촉진시키고 종자도 튼튼하게 한다.
그 다음 미생물 흙을 퍼 와서 모래와 섞었다. 이때 숯을 큰놈으로 여러 개 가져와서 망치로 부셨다. 그 다음은 얼기미로 곱게 쳐서 포트에 2/3 정도 넣었다. 이때는 20분 정도 목초 액에 침종시켰던 배추 씨앗이 조리로 건져져서 얼추 말라 있었다.
목초 액에 젖어 약간 꼽꼽한 배추씨앗을 왼쪽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한두 알씩 포트에 넣는 일은 정신만 바짝 차린다고 되지 않는다. 섬세한 손가락 놀림에 익어야 한다. 오른손 집게손가락 비트는 방향이 조금만 빗나가도 대여섯 알이 굴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근 오백포기 배추가 심어졌다. 상토로 포트를 다 채우고 나서 600배액으로 희석해 놓은 목초 액을 분무기로 뿌렸다.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면 미세한 상토들이 다 떠내려가거나 씨앗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분무기로 물을 줘야 한다.
모판은 땡볕 아래 둬서도 안 되지만 비가 맞아도 안 된다. 모판을 어디에 모셔둘까 두리번거리다가 임시로 만들어놓은 마당에 있는 '생태적 고추 건조기'가 떠올랐다. 배추 심은 포트를 고추 말리는 좌판 밑에 살그머니 밀어 넣었다.
문득 이들이 맞선을 본다고 여겨졌다. 가을 김장 날에 함께 버무려져 김장독에 담겨질 텐데 지금 하나는 싹도 나지 않은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수확물이다. 고추가 세 달 후 자기 짝이 될 배추 씨앗을 보고 콧방귀를 뀌지는 않을까?
다 자라고 말라가는 고추와 이제 깨알만한 배추 씨앗이 어떤 인사를 나눌까? 미래를 위한 어떤 언약을 주고받을까? 내가 중신아비가 된 느낌이었다. 짝이 될 운명적 만남에는 중신아비의 의례적인 소개말이 사족이다 싶어 그냥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