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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부채와 애기앉은부채의 차이를 모르겠다. 봄에 피는 꽃으로 알고 있었는데 자주빛 꽃이 숲에 가득했다. 왕조 시절 사약으로 썼을 만큼 독성이 있어 주의해야한다.
앉은부채와 애기앉은부채의 차이를 모르겠다. 봄에 피는 꽃으로 알고 있었는데 자주빛 꽃이 숲에 가득했다. 왕조 시절 사약으로 썼을 만큼 독성이 있어 주의해야한다. ⓒ 이승열
가을 들판을 바라보며 선배가 억새와 갈대의 차이를 열심히 설명했다.

"늪지대에 살며 조금 검은빛이 도는 것은 갈대야. 억세는 갈대보다 조금 연약하고 투명해서 가을 햇살에 반사 될 때 더 아름답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알고 있는, 제대로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들꽃은 거의 없었다. 그냥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면 되지 어떻게 부르던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했다.

"얘, 니가 은행나문데 너 보고 '단풍나무야 안녕' 그러면 너 기분이 좋겠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 열심히 도감을 찾고, 고수들에게 물으면서 노력했는데도 영 제자리 걸음이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꽃들, 특징만 잡아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특정 부위만 강조된 사진. 그래도 주위에서는 내가 제일 아는 것이 많아 늘 내게 묻는다.

잔대종류. 층층이 매달린 등에 불이 들어오면 좋겠다.
잔대종류. 층층이 매달린 등에 불이 들어오면 좋겠다. ⓒ 이승열

ⓒ 이승열
곰배령 숲길을 함께 걷던 동생이 결정적인 한방을 날린다.

"이렇게 꽃이 많은 곳에 올 때는 언니 말고 조금 더 고수와 함께 와야겠어. 설악산 서북주릉을 종주하는데 금강초롱 군락이 있었어. 며칠 후 신문에 금강초롱 군락이 발견됐다고 났더라" 하고 곰배령을 오르다 동생이 말했다. 보랏빛 금강초롱이 곰배령 가는 숲길 어디에고 망초처럼 흔하디 흔하게 피어 있었다. 금강초롱으로 청사초롱 밝혀 놓으면 우리네 삶도 조금은 따뜻해질까?

왕복 세 시간 반쯤 걸리는 곰배령 탐방을 고갯마루까지 가는 데만 세 시간이 넘게, 왕복해서 다섯 시간 족히 걸려 다녀왔다. 길가에도, 한발짝 들어선 숲속에도, 온통 들꽃이 지천이다. 2004년 9월 첫째 주 일요일 곰배령에 다녀왔다. 2005년 8월 하순, 다시 곰배령 고갯마루 초원에는 언제 더위가 존재했느냐는 듯 더위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늘 시간은 쏜살같다. 아직도 팔월, 채 구월이 시작되지 않은 것이 실감나지 않을 만큼 완연한 가을빛이다.

들국화란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등 특징에 맞는 이름이 있다.
들국화란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등 특징에 맞는 이름이 있다. ⓒ 이승열

엉겅퀴 종류. 참 종류도 많다. 고려엉겅퀴, 정영엉겅퀴, 지느러미엉겅퀴...
엉겅퀴 종류. 참 종류도 많다. 고려엉겅퀴, 정영엉겅퀴, 지느러미엉겅퀴... ⓒ 이승열

꽃의 모양이 로마병사가 썼던 투구를 닮았다 하여 투구꽃. 마라톤까지 뛰어가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사그라졌을 병사의 투구.
꽃의 모양이 로마병사가 썼던 투구를 닮았다 하여 투구꽃. 마라톤까지 뛰어가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사그라졌을 병사의 투구. ⓒ 이승열
여름철 주홍을 발했을 어린 동자승의 넋이 서린 동자꽃과 분홍 이질풀이 지고 그 자리를 보랏빛 가을꽃들이 채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벌개미취, 투구꽃, 쑥부쟁이, 진범, 구절초, 용담.

가을꽃은 보랏빛을 띤 것들이 많다. 청명한 가을바람 소리를 색으로 나타내면 가을꽃의 보랏빛을 닮았으리라. 여름철의 땡볕을 간직한 붉은 기운이 차마 아쉬워 푸른빛과 합쳐진 상생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지난해 9월 흔하디 흔하게 보였던 금강초롱과 투구꽃이 불과 열흘 차이인데도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오뉴월 하루 빛이 어디냐고 농담 삼을 일이 아니다. 작년에는 다 졌던 분홍빛 둥근이질풀이 곰배령 정상에서 절정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숲길 어디서고 사람들의 손을 탄 들꽃들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직 피지도 않은 투구꽃의 꽃망울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사람들이 남겼을 쓰레기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곰배령 입산 허가를 받은 동생은 좀 번거롭고 귀찮다고 했다. 반드시 팩스를 통해서만 신청하거나 국유림을 관리하는 기린경영팀을 직접 방문해야 입산허가증을 받을 수 있었다.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팩스가 없는 곳에선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주위에 팩스가 흔해서인지 아직 입산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없더란 대답을 들었다.

요 비슷하게 나온 애들만 보면 정신이 없다. 강활, 왜당귀, 어수리..등등. 어수리로 결론을 내렸다. 투명한 껍질속에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꽃망울
요 비슷하게 나온 애들만 보면 정신이 없다. 강활, 왜당귀, 어수리..등등. 어수리로 결론을 내렸다. 투명한 껍질속에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꽃망울 ⓒ 이승열

아주 오래전, 계룡산 은선 산장에서 당귀차를 팔았다. 휴가가 시작되면 짐을 싸들고 산장으로 들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냈었다. 당귀꽃
아주 오래전, 계룡산 은선 산장에서 당귀차를 팔았다. 휴가가 시작되면 짐을 싸들고 산장으로 들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냈었다. 당귀꽃 ⓒ 이승열
형식적인 요식행위일망정 희귀식물이 산재하는 보호구역을 오르는데 한번쯤은 걸러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팩스신청이나 직접 방문 신청을 고집하지 말고 노고단 탐방때처럼 홈페이지를 이용한다든가 좀 더 다양한 방법이 이용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작년에는 입산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안내문만 있을뿐 지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올해는 탐방객들의 입산 신청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여름꽃을 제대로 못 봤으니까 내년에 다시, 바람이 불어서 정상에서 쉬지 못했으니까 다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느낄 틈이 없어서 다시...늘 여행을 마무리하며 다시 떠날 명분을 찾는다.

내년 다시 곰배령을 찾을 예정이다. 작년 강선골에 둥지를 튼 미숫가루를 팔던 젊은 부부는 8월 15일 직전에 곰배령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올해도 결국 열흘은 넘기고 곰배령을 찾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곳 곰배령. 내년에도 후년이 되면 더 틈실하게 들꽃들이 더 뿌리를 내렸을 곰배령을 찾고 싶다.

흰진범 엄마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올망졸망 가족을 이끌고 나들이 가는 오리 가족
흰진범 엄마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올망졸망 가족을 이끌고 나들이 가는 오리 가족 ⓒ 이승열

겨울철 식량을 구하러 나간 큰스님을 기다리던 어린 동자가 스님을 기다리다 얼어 죽은 곳에 동자의 넋이 주홍의 꽃으로 환생하여 스님을 기다린다 했다.
겨울철 식량을 구하러 나간 큰스님을 기다리던 어린 동자가 스님을 기다리다 얼어 죽은 곳에 동자의 넋이 주홍의 꽃으로 환생하여 스님을 기다린다 했다. ⓒ 이승열

덧붙이는 글 | 곰배령 여행기와 함께 쓴 꽃 이야기입니다. 아직 제대로 이름을 모르는게 더 많습니다. 열심히 찾았는데 혹 틀렸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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