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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복식을 입고 연주하는 종묘제례악 악사들
고증복식을 입고 연주하는 종묘제례악 악사들 ⓒ 김영조
전통문화도 꾸준히 변천되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복식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여성의 저고리 길이만 봐도 조선 초기는 무려 81cm나 되어 엉덩이를 덮을 만큼 길었지만 조선말에 오면 14.5cm까지 짧아져 혼자서는 도저히 입지 못할 정도까지 된 것을 보면 분명하다. 그래서 현재의 전통한복이란 것도 1920년대 이후 정착된 모습이고, 조선초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복식도 그런데 특수한 옷에 있어서도 변화란 분명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수한 옷의 경우는 현재의 옷이 원형을 제대로 계승하고 유지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확한 고증에 의한 옛 모습의 재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8월 25일) 그런 뜻이 담긴 행사가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늦은 2시에 있었다. 그 이름은 '종묘제례악 복식고증 시연회'이며, 국립국악원이 주최하고, 복식제작은 '한국복식문화연구원'이 맡았다.

맨 먼저 국립남도국악원 이숙희 학예연구사의 '종묘제례악 연주복식 및 의물의 음악사적 고증'이란 제목으로 발표가 있었고, 이어서 고증복식을 입은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연주와 무용단의 무용이 있었다. 다음으로 임재영 한성대 교수의 종묘제례악 연주 복식 제작 고증 발표가 있었는데 현재 복식과 고증된 복식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관심을 모았다.

등가, 헌가 악공과 악사(집박)가 고증복식을 입고 있다.
등가, 헌가 악공과 악사(집박)가 고증복식을 입고 있다. ⓒ 김영조
종묘제례악 연주복식의 형태는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종묘의궤', '춘관통고', '증보문헌비고', '조선악개요' 따위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 현재의 종묘제례악 연주복식은 조선말기의 '조선악개요'(1892, 1897)에 따른 것으로 초기의 문헌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중 '악학궤범'의 기록은 원형을 가장 정확하게 갖춘 모습이지만 역사적 변천에 따른 시대상황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따라서 이 날의 고증복식은 원형을 전승하되 당대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종묘의궤'(1706년)를 고증 근거의 자료로 삼았다고 복식제작을 한 임재영 교수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의궤'는 악기, 악기편성, 의물(儀物:의례 때 상징적으로 쓰는 여러 가지 물건) 등 당시의 음악제도를 포괄적으로 쓰고 있어 종묘제례악의 종합적 고증에 잘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모두가 알다시피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한 악기 연주와 노래, 춤을 말한다. 조선 세종 때 궁중연회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세조10년(1464) 제례에 필요한 악곡이 첨가되면서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무형 문화재 제1호이며,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증복식을 재현하는 데는 종묘의궤뿐 아니라 '종묘친제규제도설' 병풍에 있는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이 병풍은 19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위에는 종묘의례를 그림을 나타냈고, 아래는 의례의 절차를 붓글씨로 쓴 것이다. 현재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대업 일무 악공복식 / 왼쪽 고증복식,  오른쪽 현재복식
정대업 일무 악공복식 / 왼쪽 고증복식, 오른쪽 현재복식 ⓒ 김영조
이번 발표에서 현재복식과 고증복식의 차이점들을 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정대업 일무는 머리에 현재 복두를 쓰고 있지만 고증복식은 모양이 아주 다른 피변을 쓰며, 허리띠는 현재는 가는 끈인 남사대지만 백초대, 적말대 등으로 폭이 넓은 띠를 쓴다. 또 신발의 경우 현재는 목이 긴 화(靴:장화처럼 목이 긴 신) 계통의 흑피화 등을 신었지만 고증에선 집박 외엔 목이 없는 리(履:목이 짧은 신) 계통의 오피리를 신는다.

또 집박이 입는 녹초삼에 현재는 흉배를 붙이고 있지만 고증에선 흉배가 없다. 특히 고증복식에서는 겉옷 안에 중간 속옷의 일종인 창의(氅衣:벼슬아치가 평상시에 입던 웃옷, 중단)고 상(裳:예복용 치마)를 입음으로서 안에 바지저고리만 입는 현재의 복식에 비해 훨씬 품위가 돋보이고 맵시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헌데 임재영 교수는 이 고증복식들 중 창의와 저고리바지 등은 입고 연주하는 악사들의 편의를 위해 가볍고, 시원한 화학섬유를 썼다고 말한다. 원래의 복식은 천연섬유일 텐데 그 까닭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임 교수는 말한다.

"이 옷들을 입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연주를 해야 하는데 자주 빨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변색이 될 가능성 등을 고려해서 바꾼 것이다. 현재의 복식이 안에 창의를 입지 않는 것과 같이 현대로 오면서 기능성을 증시한 결과로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한복의 특성상 안에 창의를 입으면 훨씬 맵시가 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러 벌 옷을 껴입었을 때 악사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헤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사들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사들 ⓒ 김영조
그런데 현재의 복식과 고증의 복식에서 차이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현재 쓰는 종묘제례악 연주복식은 '종묘의궤'와는 부분적으론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아마도 조선말기의 '조선악개요'(1892, 1897)에 따른 것과 일제의 영향을 받아 변화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전체적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로 오면서 실용성과 기능성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고증복식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질문했다.

"색감을 내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와 현재의 옷감이 다르지만 다행히 비슷한 옷감을 찾았다. 문제는 염색인데 예전의 기록을 보면 붉은 색이 '홍색', '다홍색', '적색'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지만 실제 그 색깔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전해지는 그림 등을 통해 짐작하고, 그에 맞춰 염색을 했다. 그런데 옷감으로 있을 때와 안감 등을 대서 옷을 만들었을 때의 색깔이 다르고, 또 무대에서 조명을 하면 그 느낌이 또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맞추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고증복식의 재현이 녹록치 않음을 얘기하는 대목이다. 학문의 발달, 전통문화의 발전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연구, 노력하는 학자들의 공이 크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무형 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은 아주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이 문화유산의 유지, 발전은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이다. 그런데 '종묘제례악'의 유지, 발전의 방법은 계속해서 연주하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음악과 옷에 대한 고증을 통해 원형을 찾아내는 것도 그 하나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고증복식들 / 정대업 일무 악공, 등가.헌가 악공, 악사(집박), 보태평 일무 악공(왼쪽부터)
고증복식들 / 정대업 일무 악공, 등가.헌가 악공, 악사(집박), 보태평 일무 악공(왼쪽부터) ⓒ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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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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