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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당하게 살리라> 표지
<나는 당당하게 살리라> 표지 ⓒ 푸른나무
봉건시대에는 삼종지도라 하여 결혼을 하기 전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의 뜻을 따르는 것이 여자의 도리였다.

여자들은 평생 동안 억압되어 자신의 생각을 펼 수 없었으며, 아버지와 남편, 자식에 대한 복종의무를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기나긴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 여성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특별한 여성들이 있다.

나도 고주몽의 후예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구성된 설화 '온달전'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설화는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이야기만큼 달콤하거나 환상적이지 않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는 불행에 처해 있지만 운명에 순응하는 착한 여인으로 어느 날 근사한 왕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귀족과 결혼해 편안한 인생을 사는 것이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런 부귀를 저버리고 왕자는커녕, 귀족이나 양민도 아닌 천민 출신의 못생긴 바보를 스스로 찾아가다니. 거기다 재물까지 싸들고 가서 바보남편 교육까지 시켜야 하는 상황이란, 요즘을 사는 여성이라 해도 달갑지 않다.

왜? 평강공주는 바보온달에게 시집을 갔을까? 평강공주는 고주몽의 후예요, 평강왕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나랏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거기다 부모가 정해주는 정략적인 결혼을 해야만 했다. 자기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 갈 수 없다고 판단한, 평강공주는 과감히 공주라는 지위를 떨쳐버리고 바보로 소문난 온달을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온달을 장군으로 키워내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자 했다.

성스러운 임금, 큰 할머니

선덕 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오늘날까지 후덕한 왕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평왕에겐 아들이 없었다. 덕만 공주는 632년, 진평왕이 죽은 후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왕이 되었다. 진평왕이 왕위를 사촌동생인 용수와 용춘에게 물려주려 하자, 덕만 공주는 남자만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며,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당시로는 여인의 이런 야심은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받아드리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였다.

선덕여왕이 된 이후, 여자가 왕이 됐다하여 귀족들은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웃나라는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불심과 덕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하나로 결속시켰다. 신라문화를 꽃피웠으며 김춘추와 김유신과 같은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업적으로 신라의 여러 중에서도 칭송받는 왕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꾼 천재시인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억압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시기가 조선 중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았던 허난설헌은 차라리 평범한 여인으로 태어났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토록 깊은 한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문가에 태어나 당시 여인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사서삼경을 배우고 시를 익혔으나, 사회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난설헌. 그의 불행은 결혼과 함께 시작된다. 남편되는 이 역시, 명문가의 자손이나 사람됨이 깊지 않고 넓지 못하여 자신보다 잘난 아내를 홀대한다. 아이를 셋 두었지만 모두 일찍 죽어 난설헌의 마음에 병은 깊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던 친정오라버니마저 죽자 더 이상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난설헌이 죽자 동생 허균은 누이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을 내었다. 이 시집은 우리나라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더 유명해졌다 한다. 조선의 학자들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시인이 여인이라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했다하니 당시 남성들의 졸렬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난설헌은 자신의 불행을 개인 차원에서만 찾지 않았다.

'나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구나. 첫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남편 김성립과 결혼한 것이요, 셋째는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이로다.'

이렇듯 깊은 한을 품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스물셋에 지었던 시처럼 세상을 떠나갔다.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가 차갑구나.'

최초의 여성 사업가

김만덕은 부모를 여의고 기녀집에 보내진다. 기생으로 이름이 날쯤, 만덕은 겉은 화려하나 가난한 여인들보다 훨씬 못한 것이 기녀의 신세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제주도 최고 행정 책임자를 찾아가 사정하여 양민의 신분을 되찾아 기녀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객주운영으로 사업에 성공하여 큰 돈을 번다. 그 무렵 제주도에는 몇 년간 흉년이 들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만덕은 쌀 500석을 관가로 보내 굶는 사람을 돕고자 나섰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큰 기부라 관가에선 깜짝 놀랐다.

이 사실은 임금께도 알려져 궁궐에 초대받고, 금강산을 구경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 이후 많은 선비들이 만덕의 큰 덕을 칭송하는 글을 써 보내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으며 상업의 원리를 파악하고 적절히 활용했다. 더욱이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를 위해 모든 부를 내놓을 수 있는 인물로 존경받는 사업가였던 것이다.

최초의 여의사

박점동은 1886년 11월 10살 나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의 학생이 되었다. 점동이 학교에 들어갔을 때에 이화학당에는 밥이나 굶지 말라고 맡긴 동갑내기 꽃님이와 죽어 가는 여자 환자의 품속에서 구해 낸 네 살난 별단이, 벼슬아치의 첩으로 영어를 배우고자 했던 김씨 부인 이렇게 4명이 있었다. 점동은 배제학당 일을 돕던 아버지의 권유로 들어오게 된다. 총명했던 점동은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앙심도 키우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1887년 10월 여성 의사가 조선에 들어와 '보구여관'이라는 여성들을 위한 병원을 열었다. 당시 여성들은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꺼려 몸이 아파도 의사를 찾지 않고 죽어가는 일이 많았다. 이 곳 일을 돕던 점동은 조선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선교 활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던 에스터는 남편과 함께 유학을 하던 중 졸업을 3주 앞두고 남편이 병으로 죽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의사자격증을 취득하자 에스터는 서둘러 조선으로 돌아와 '보구여관'일을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였던 에스터은 병원 진료가 끝난 시간이나 쉬는 날이면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가정 방문에 나섰다. 그렇게 쉬지 않고 일을 하다 1910년 4월 13일 34세의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을 얻어 죽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기로 약속했던 가냘픈 소녀는 험난한 고비를 넘기고 강하고 당당한 여의사로 성장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환자를 진료했고 계몽사업을 벌렸다. 에스터는 자신의 성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류애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오늘 날까지도 우리가 추앙하는 여인상은 누구인가? 훌륭한 아내이고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으뜸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시대가 바뀌어 여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일자리가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신사임당을 표본으로 세워 여성의 노동을 가중시키고 있다.

아직도 남성우월주의에 빠져 여자들이 하는 일을 경시하는 남성들의 태도로 많은 직장여성들이 가사노동까지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감내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에 실린 여인들은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 험난한 삶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가정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자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 할 수도 있지만 안정된 가정을 가꾸는 것이 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꼭 모든 여성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많은 남성들이 사회생활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선 반은 남성이 직장생활을 하고 나머지 반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제는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할 때다.

가정을 꾸리고 생활할 때 누군가 좀 여유를 갖고 집안 살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가사를 담당하는 것이 꼭 여자이거나 남자일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일을 즐겁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또 꼭 부부 중 누군가가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 모두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가사노동의 중요성과 분배의 효율성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여성의 사회 참여도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가사노동이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근원적인 일이며 경제적 가치 또한 높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도서제목 : 나는 당당하게 살리라
저    자 : 박정희
출 판 사 : 푸른나무

리더스가이드와 알라딘에도 실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살리라 - 한국사를 뒤흔든 여성들

박정희 지음, 한희란 그림, 푸른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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