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김훈이란 이름은 언론인으로서보다 소설가로 자연스레 불리운다. 그것도 대형 스타 작가로서 말이다. 김훈이 대형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다. '50대 등단,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단 한 편의 장편과 단편만으로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우리시대의 문장가 김훈'이란 홍보 문구에서 단적으로 읽을 수 있듯이, 그는 쾌속질주로 한국문학의 노른자위를 꿰차고 들어왔다.
그런데 소설가로서 김훈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면서도 그리 썩 달갑지 않다. 그가 언론에 종사하면서 동종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기자보다 문학적 재능이 탁월하기에, 언젠가 문학에 투신할 경우 한국문학의 풍요로움을 위해 새로운 피가 공급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 이들에게는 김훈의 출현이 반가운 일이다.
가뜩이나 1990년대 이후 여성 작가들과 젊은 작가들이 한국문학의 주류인 현실을 감안해 볼 때, 50대 중반 남성인 김훈의 문제적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문학의 풍요로움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한다. 그동안 김훈 소설에 대해 문학 안팎에서 바쳐진 숱한 헌사들을 잠깐만이라도 살펴볼 수 있다면, 김훈에 대한 이 같은 기대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 <한국평화문학> 2집, 237~8쪽, '개별화의 마성(魔性)은 공허하다' 몇 토막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소설 <칼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작가 김훈(57). 과연 그는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문언유착'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작가일까? 아니면 기자생활을 할 때 다른 기자들에 비해 '존경받는' 문장가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기자생활을 팽개치고 책들을 펴내자마자 전 언론에서 탁월한 작가로 마구 띄웠을까?
"이 구조화 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란 문학상 제도는 김훈의 소설을 명실공히 스타 작가의 명단에 등재시키는 데 한 몫을 다 하였다. 이로부터 김훈은 언론인으로서보다 소설가로서, 그것도 미적 성취를 보증받은(?) 대형 작가로서 상징자본을 단숨에 획득하였다." - <한국평화문학> 2집, 239쪽, 몇 토막
1970년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를 맡고 있는 문학평론가 고명철이 요즈음 한창 잘 나가는(?) 작가 김훈의 소설을 도마에 올렸다. 그냥 도마에 올린 게 아니라 김훈 소설의 속내가 숨겨져 있는 은빛 비늘을 몽땅 벗겨내고, 김훈 소설의 내장을 모조리 끄집어낸 것은 물론 김훈 소설의 살점까지 한 점 한 점 포를 떴다.
고명철은 지난 주말에 나온 '평화, 폭력 그리고 문학'이란 제목의 반년간 문예지 <한국평화문학>(화남) 제2집에 발표한 '개별화의 마성(魔性)은 공허하다'라는 글에서 김훈이 쓴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에 감추어진 허상을 조목조목 캐냈다. 고씨는 김훈의 소설에 수많은 기자들과 문학평론가, 작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문체의 마술적 매혹" 때문이며, 이는 "개별적 진실의 맹목화"와 다름없다고 밝혔다.
김훈의 소설에서 마술적 문체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소설 속 인물들이 고백조의 언어를 적극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 또한 이 같은 고백조의 담론은 "듣는 이로 하여금 고백을 하는 자와 자연스레 친연성을 갖도록" 하여, 김훈 소설에 대한 가독성을 한껏 드높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훈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소설 곳곳에서 고백조의 담론을 이용한다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고명철은 바로 이 고백조의 담론 때문에 김훈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지극히 개별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개별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과 개별적 진실을 맹목화하는 것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 자신의 개별적 진실을 타자에게 고백하되, 그 고백은 타자를 향해 개별적 진실을 설득하는 과정이 되어서는 곤란할 뿐만 아니라 개별적 진실에 대한 자기 확신을 다짐하는 것도 곤란하다. 이럴 때 우려되는 점은 그 고백을 듣는 타자는 주체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대면하지 못한 채 주체의 진실을 일방통행식으로 접수하게 된다." - 242쪽, 몇 토막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 없었다"(<칼의 노래> 1권 32쪽)라거나,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71쪽),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74쪽) 등도 결국 이순신의 개별적 진실이 담긴 고백이 아니라 "김훈이 창조해 낸 이순신이란 인물"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칼의 노래>를 읽으며 이순신의 개별적 진실의 맹목화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고명철은 김훈의 <칼의 노래>는 "중세의 왕도 정치 구현이란 현실 국면과 부딪치지 않고, 작가에 의해 이미 선택되어진 근대적 개인의 면모를 이순신에게 덧입히는 차원으로서는 이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는다. 이어 김훈에게 은근슬쩍 바통을 넘긴다. "중세와 근대의 충돌 속에서 '인간 이순신'의 진정한 면모를 발견할 수는 없었을까"라며.
하지만 고씨는 김훈에게 던진 바통을 곧바로 되돌려받는다. 왜? "역사나 사회의 거대 담론에 대한 관심이 조금도 없는" 김훈에게서 그러한 기대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김훈이 기댈 수 있는 서사는 결국 "개별적 인물이 감각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천착"이며, 김훈은 그 감각을 죽음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
그렇다면 김훈은 죽음을 통해 어떻게 "육체의 감각에 촉각을 곤두" 세우는가. 김훈은 "죽음의 순간 육체의 감각이 전율하면서 그토록 집요하게 궁구하던 개별자의 진실의 가치를 보증하고자 한다". 하지만 고씨는 "육체의 감각을 통해 획득한 개별자의 진실의 가치는 공허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못박는다. 그리고 이때 드러나는 것은 "육체의 개별 감각의 극대화를 위한 김훈 특유의 문체의 마술적 힘"뿐이라고 말한다.
고명철은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 나오는 가야국 순장 풍속 중에서 악공의 연주와 우륵이 춤을 추는 장면, 즉 "북이 울려 새벽 산을 흔들었다. 북소리가 산봉우리들을 멀리 밀어내, 흔들리는 봉우리가 밀려난 자리에서 남은 시간들이 곤두박질로 무너지고 새로운 시간이 돋아나는 환영이 우륵의 눈 앞에 펼쳐졌다"를 떠올린다.
고씨는 이 장면에서 "그들은 죽음의 형식을 입어 영원한 삶의 지경에 이른다. 종교적 제의와 예술이 이처럼 동거하는 가운데 순장자의 생의 감각은 미적 차원의 소멸의 감각으로 자연스레 미끄러진다"라고 주무른다. 하지만 고씨는 "여기서 김훈은 순장자들이 겪어야 할 생의 비참한 순간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마성(魔性)을 갖게 되고, 물신화(物神化)된다"고 귀띔한다.
고명철은 김훈의 소설에서 가장 우려할 점은 김훈 스스로 추구하고자 하는 서사적 문제라고 곱씹는다. 즉, "고백의 언어를 통한 인간 개별자의 진실에 천착하고, 육체의 개별화된 감각의 극대화를 통해 또한 인간의 개별적 진실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김훈의 소설에서 인간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씨는 김훈의 소설에는 타자는 있으나 "주체와 타자의 관계 맺기를 통한 서로의 존재 여부 및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데 심드렁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개별화된 육체의 감각을 중시하는 김훈에게 그 감각을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은 있으나 마나한 껍데기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역사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이순신, 선조, 우륵, 이사부, 야로 등 역사 속에서 인물들을 호명하고 있으나, 정작 그들에게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인식을 찾기란 지난한 일이다. 거듭 강조하듯이 그들이 접하는 세계는 환(幻)이며, 그 세계로부터 자기소외의 방식을 선택하는, 세계로부터 고립된 개별자의 진실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을 따름이다." - 256쪽, 몇 토막
지난 일요일, 인기리에 방영되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막을 내렸다. 마지막 회, 유성룡의 사직서를 받아들이는 선조와 노량해전에서 갑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이순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리고 작가 김훈은 고명철이 날카롭게 쏜 비판의 화살을 어떻게 막을까. 과연 되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