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가 펴낸 <8.15의 기억>은 60년 전 격동의 현대사를 겪어보지 못했다는 약점 아닌 약점을 건드려 놓는 책이다. 이 책은 1945년을 전후로 한, 이른바 '해방정국'을 젊은이로 살았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이 직접 말하는 8.15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가 접했던 8.15가 거의 건조체로 된 현대사 관련 서적에서였음을 인정한다면, 이 책의 발간은 새롭고 뜻깊은 시도인 셈이다.
<8.15의 기억>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원래 방송용이었다. 한국방송공사(KBS)가 광복 60년을 맞아 민중들의 체험을 발굴하고자 '우리는 8.15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제작하면서 채록한 구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에는 방송에서 시간제약으로 담지 못했던 내용까지 수록돼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구술자들은 40명이다. 신문 방송사 기자, 경찰, 공무원, 교사, 의사, 미군 통역관은 물론 독립운동가, 농부, 철도노동자, 미용사, 만화가, 해녀에 이르기까지 당시 직업도 다양하다. 이들은 어떠한 틀에 맞추어 엄선된 인물들이 아니다. 이 책 끄트머리에 "공식적·제도적인 역사 서술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일반 민중들의 생생한 체험에 주목했다"고 밝히고 있는 대로, 국내 각지와 중국, 일본, 소련 등지에서 당시를 살았던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 책에는 8월 28일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공개를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조문기 이사장과 친일명단에 포함된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의 증언이 함께 실려 있다.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기막히다. - 아래 상자기사 참조)
"1945년 8월 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소리가 없었다"
증언자들이 본 1945년 8월 15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다수의 증언은,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에서 벗어난다. 당일 낮 12시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반 민중들 중에서 일본이 그렇게 쉽사리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별로 없었고, 알았더라도 일본 경찰의 위세에 눌려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소식이 들려오기는 하는데,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더라"(정재도. 당시 교사)거나 "뛸 듯이 기쁘고 좋았으나 아무튼 그날은 어수선했다"(강창덕. 당시 공무원)는 증언이 나온다. 심지어는 8월 18일 동료직원의 말을 듣고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었다는 사람(서정주. 당시 교사)도 있었다.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일하던 문제안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15일에 해방사실을 안 사람은 몇 명 안됩니다. 요즘에 와서는 가끔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8월 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펴지고 태극기가 물결치듯 휘날렸다'고 떠벌리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그날 서울 큰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같은 사건을 놓고 한쪽은 '항쟁', 한쪽은 '폭동'
증언자들의 당시 직업과 입장이 다르다보니 같은 시대의 같은 사건을 겪었는데도 이들의 시각차는 커 보인다. 예를 들어 46년 10월 1일 발생한 대구사건, 48년 제주 4.3사건, 신탁통치 문제 등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먼저, 대구사건은 관점에 따라 '항쟁'이 되기도 하고 '폭동'이 되기도 한다. 해방 후 민중들이 대중운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조직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계를 위해 자생적으로 시작된 투쟁이었다는 진술(이일재. 당시 노조 간부)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 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나선 사람들"을 "공산당 총 책임자 박헌영의 지령에 의해" 움직인 주동자들이 선동한 사건으로 여긴 사람(서정주. 당시 교장)도 있었다.
제주 4.3 사건도 피해자의 증언은 "왜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마을 사람들을 죽였나 생각하면, 그때는 (산)위쪽에 사는 사람들을 무조건 빨갱이로 생각했던 거예요"(양복천. 4.3사건으로 아들 사망)라거나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대통령인지 누군지 몰라도 분명히 위에서 계염령을 내렸으니까 다 죽인 게 아니겠어요"(양자생. 4.3사건으로 남편 사망)라는 내용이지만, 당시 우익활동을 했던 진술자의 입장은 다르다.
"게릴라전의 특성을 이해해야 해. 왜냐하면 게릴라가 애들 데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데리고 와서 우리 군데 안심시켜 놓고 모조리 죽이는데…, 몇 번은 당할 수 있어요. 하지만 뻔히 알면서도 계속 당하고 죽어야 하느냐 말입니다."(채병률. 당시 이북학련 활동)
"우익의 테러? 그건 살기 위한 싸움이었어"
좌우익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여러 군데 눈에 띈다. "그때는 정치적인 색깔이 다르면 죽고 죽이던 시절이라 만나서 이야기하기도 힘들었어요"(유병화. 당시 노동운동)라는 증언은 좌우익간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테러의 중심은 우익쪽이지 좌익 쪽은 아니었어요. 좌익은 우익 쪽에서 테러가 들어오면 막는다는 식으로 방어적"(이기형. 당시 언론인)이었다는 진술에 대한 반론에 해당하는 증언도 있다.
"'백색테러단'이라고 해서 이북학련과 서북청년회에 대해 안 좋은 시선들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의 행동을 악하게만 본 거야. 북에서 내려와 보니까, 여기까지 공산화되면 우리가 갈 데가 없겠더라고요. 어디로 가겠어요. 그러니까 사생결단하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건 살기 위한 싸움이었어." (채병률)
한편 이 책에는 일반 역사책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의미 있는 증언이 나온다. ▲최초의 한국방송은 미군정이 들어온 후인 1945년 9월 9일부터 시작됐다는 점 ▲해방 후 '큰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를 받아야만 했던 상황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레저를 위해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가는 전기기관차가 운행되었다는 사실 ▲파마 한번에 쌀 한 말 값인데도 가게 앞에 긴 줄이 생길 정도로 유행했던 풍경 등은 기억할 만하다.
그래도 제대로 된 역사책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진술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경험과 시각만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려는 게 인간의 속성 아닐까 싶다. 또한 진술자 중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입장과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는 이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것은 분단 상황에서 북쪽 인사들이나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접하기 힘들고, 아직까지 '반공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 책은 해방 공간의 진실을 밝히는데 디딤돌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과거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역사의 맥락을 제대로 짚기 위해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제대로 된 역사책과 역사 교육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 | 친일인명사전 만든 사람과 친일명단에 오른 사람 증언 함께 실려 | | |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과 이창녕 전 홍익대 총장 | | | | 어제(8월 29일)는 경술국치일이자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을 발표한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에는 명단 공개를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조문기 이사장과 친일명단에 포함된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의 증언이 함께 실려 있다.
조문기 이사장은 19살이던 1945년, 대한애국청년단을 결성하여 부민관 폭파사건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8.15를 두고 "해방된 것이 '민족해방'된 것이 아니라 '친일파 해방'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지시를 받고 눈치를 보던 친일파들이 광복이 되고 나니 '상전'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친일파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관리가 되어 일본한테서 월급을 받아먹었다고 친일파냐?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마음 속으로 '이렇게 하면 조국을 해롭게 하는 거다', '이렇게 하면 이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다' 그런 걸 알면서도 그 일에 충실한 사람들. 말하자면 조국을 의식적으로 배신한 사람들, 조국의 이익보다도 일본의 이익을 앞세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친일파입니다."
일제시대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창녕군수를 지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 참고로 그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참회, 사죄해왔다. 그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보자.
"그런데 요즘 보면 '당시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들을 많이 하는데, 물론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먹고 사는 것도 정도의 문제라고 봅니다. 고생스럽게 살 수도 있고 좀 편하게 사는 수도 있는데, 친일한 사람들은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이 앞선 거예요. 그러니까 고생하면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데,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것 견디기 힘드니까. 인간적 품격이라고 할까 수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깊은 사람이 아니면 여간해서는 견디기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기 어려운 거죠." / 김용국 | | | | |
덧붙이는 글 | 한국방송공사 홈페이지(http://www.kbs.co.kr)에서 '광복 60주년 프로젝트'를 클릭하면 8월 9일부터 12일까지 방송된 <우리는 8.15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다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