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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집집마다 크든 작든 간에 대부분 푸른 잔디밭이 딸린 정원이 있는 이곳 뉴질랜드의 주택들은 좁고 답답한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 있던 내게는 그야말로 도시 한복판에 있어도 전원주택이며 전후좌우로 이웃집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별장인 것처럼 느껴졌다. 생명이 없는 딱딱한 광물성의 시멘트 블록이 아니라 푹신한 생명의 탄력이 느껴지는 정원의 잔디밭을 밟으며 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듯이, 그처럼 푸른 잔디밭을 향유하기 위해서도 역시 감당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잔디 깎기가 바로 그 일. 잔디가 잘 자라는 봄과 여름철에는 2주에 한 번씩, 가을과 겨울철에는 3∼4주에 한 번씩 잔디를 깎아 주어야 보기 좋고 밟기에도 좋은 잔디밭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2.
대낮에도 조용하기 그지없는 주택가가 주말 오전이나 오후가 되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에 몹시도 시끄러워진다. 쉬는 날을 이용해 자기집 정원의 잔디밭을 깎는 소리이다. 멀리서도 제법 시끄럽게 들리니 잔디를 깎는 당사자의 귀에는 데시벨 수치가 상당히 높은 굉음으로 들릴 터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귀마개를 착용하고 잔디를 깎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잔디 깎기를 업으로 삼아 하는 사람들이라면 난청 방지를 위해서 귀마개가 필수 작업 도구가 된다. 그렇지만 아내와 내가 공동으로 하는 우리집 잔디 깎기 작업에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귀마개가 필요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석유를 넣어 모터를 돌려서 작동되는 잔디깎이 기계(機械)가 아니라 손으로 미는 수동식 잔디깎이 기구(器具)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 사람들 대다수가 사용하는 '기계'가 아니라 어쩌다 보게 되면 반가운 느낌이 들 정도로 희귀한 '기구'를 선택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내가 워낙 기계치라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터가 달린 기계식 잔디깎이를 사용할 엄두가 안 났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잔디를 깎는 데까지 화석 연료를 축내고 싶지는 않다는 친환경주의적 사명감의 발로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내 몸의 힘을 이용해서 내 땀을 흘려 잔디를 깎으면 운동도 되어 잔디도 깎고 운동도 하고, 즉 '도랑치고 가재도 잡고' 식의 일석이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뒷통수가 좀 간지럽다. 그래, 수동식 잔디깎이가 기계식 잔디깎이의 절반 가격도 되지 않는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크게 작용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자. 이런 나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가? 약간의 망설임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대답하련다.
수동식 잔디깎이로 잔디를 깎으면 작업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리긴 하지만, 우리집 잔디밭이 모터의 동력을 빌려야 할 정도로 넓지 않으니 그렇다. 또한 수동식 잔디깎이로 잔디를 깎는 일은 기계식 잔디깎이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잔디 깎는 즐거움을 안겨 주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처음에는 웽웽거리며 모터가 돌아가면서 신속하게 작업을 해내는 이웃들의 기계식 잔디깎이가 많이 의식되어 우리집 수동식 잔디깎이가 몹시도 궁색하고 초라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내도 좀 창피한 마음이 들었는지 아니면 잔디를 깎는 일은 남자의 할 일이려니 하고 생각했는지, 한동안은 내가 잔디를 깎아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잔디 깎는 재미를 혼자서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뒷짐만 지고 있던 아내가 어쩐 일인지 잔디를 깎아 보겠다고 나섰다. 아내는 잔디깎이를 손으로 밀며 두어 번 잔디밭을 오가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쉽고 재미있네. 그 이후로 아내는 본격적으로 잔디 깎기에 나섰고 요즘도 잔디깎이를 미는 쪽은 나보다는 아내인 경우가 더 많다. 그만큼 나의 즐거움은 줄었지만 아내의 즐거움이 곧 나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3.
잔디 깎기의 즐거움은 먼저 그 소리에서 느껴진다. 내 손이 잔디깎이를 밀고 나갈 때 회전 칼날이 돌아가면서 사각사각거리며 풀을 잘라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 마음밭에 가득 자라난 온갖 근심과 분노와 초조와 불안의 잡풀들까지도 뎅강뎅강 잘려나가는 듯해 마음이 편하고 개운해진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웽웽거리며 돌아가는 모터를 돌리는 기계식 잔디깎이로는 도저히 이런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소리와 더불어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 역시 즐겁다. 회전 칼날에 저항하는 풀들의 떨림이 잔디깎이의 손잡이를 통하여 내 손에 전해지면서 느껴지는 생명력은 그것이 비록 목숨을 겨누는 칼날 앞에서 내지르는 비명이라고 할지라도 싱그러운 데가 있다. 또한 내 발은 잔디깎이가 지나가기 전과 지나가고 난 후에 달라진 잔디밭의 감촉을 구별하며 즐거워한다. 이와 비교하면 모터를 돌리는 기계식 잔디깎이는 너무나 전면적이고 무자비해서 손과 발이 즐거움을 누릴 여지를 거의 주지 못할 것이다.
다음의 즐거움은 이제 코의 차례이다. 풀잎 하나 꺾어도 그 향기가 나는데, 잔디밭을 깎은 자리에 어찌 향긋한 풀냄새가 진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후각으로는 향긋하게 느껴지지만 풀의 입장에서는 피비린내에 다름 아닐 터이니, 풀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코의 즐거움 역시 모터를 돌리기 위해 석유를 태워야 하는 기계식 잔디깎이를 사용하게 되면 반감되고 말 것이다. 모터가 뿜어 내는 석유 타는 냄새가 풀잎 향기를 오염 시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잔디 깎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기분 좋게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점이다. 2시간 정도 걸려 집 안팎의 잔디밭을 다 깎고 나면 온몸이 땀 범벅이 되는데, 그게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사우나나 운동 등을 통하여 일부러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틀기에 한여름에도 좀처럼 땀 한 방울 흘릴 기회가 없는 요즘 세상에 내 몸을 움직여서 스스로 만들어낸 이 땀방울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기계식 잔디깎이로 잔디를 깎는다면 아마도 30∼40분이면 우리집 잔디 깎기 작업을 모두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 혼자서 말이다. 그러나 기계는 땀을 흘리지 않듯이, 그렇게 간단히 잔디를 깎고 난 내 몸에는 땀이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땀이 흐리지 않는 몸은 점점 기계를 닮아갈 것이다. 누군가 와서 스위치를 올려주지 않으면 절대로 혼자서는 작동하지 않는 그런 기계가.
아내와 내가 우리의 몸으로 밀고 나가야만 하는 수동식 잔디깎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땀을 흘리면서 잔디를 깎으며 우리는 오래도록 몸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잔디 깎기 : 잔디를 깎는 일
잔디깎이 : 잔디를 깎는 기계나 기구